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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dy LEE Jan 16. 2023

눈, 쌀, 도야호수

2023년 1월 4일에서 5일 사이에 경험한 신비 

 오타루에서 머물렀던 리틀배럴 도미토리. 그곳에서 JR 고속열차를 탈 수 있는 미나미오타루 역까지는 10분 정도 되는 거리였지만 이미 5시간 정도 오타루 시내의 눈밭 길 위에서 눈바람을 견디며  쉬지 않고 움직인 데다가 한 걸음 한 걸음 눈더미 속에서 꺼내 올리듯. 캐리어를 끌고 걸으니 역사에 도착했을 때는 몸이 후들 거렸다. 


 추움, 허기짐, 무거움. 게다가 다음 행선지인 도야 역으로 가는 중, 밖이 어둑해져 무사히 다음 숙소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스러움까지 한꺼번에 몸에 실리는 바람에 고속열차 안에서, 몸이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처음 가 보는 곳을 여행하는 중에는, 몸에 긴장감이 서린다. 


 2시간 반쯤 지나 도야 역에 도착했다. 땅에 이미 눈이 한가득 깔려있는데  밤하늘에서도 쉴 새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도야는 오타루보다 더 빈틈없이 칠이 되어 있었다. 땟국 한 방울 묻어있지 않은 새하얀 공간 안에 서 있으니, 나 또한 결점 하나 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이 된 것 같다. 하얀색이 반사하는 수많은 빛줄기에 머리를 얻어맞아 정신을 잃은 건지....   


 도야 역에 들어서자 한편에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이 숙소 명과 친구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었다. 아저씨는 우리가 다가서자 킴? (같이 간 친구가 김 씨) 이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아저씨의 깨끗하고 선한 미소가 보였다. 뒷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당장 환하게 웃어 버리는 미소는 어쩔 수 없게 한다. 아저씨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조금 전까지 무겁고 긴장되어 있던 몸이 부드럽게 풀려갔다. 저분이 일하는 곳이라면 따뜻하고 안락할 것 같아... 


 미소천사 아저씨가 운전하는 숙소 셔틀버스는 눈 내리는 밤길을 십분 쯤 달려 도야호숫가 바로 앞에 위치한 도야칸코호텔에 도착했다. 저녁 7시가 넘었을 뿐인데 마을은 잠자리에 든 듯 고요했다. 숨을 들이마시자, 물 향과 눈 향이 조화롭게 블렌딩 된 공기 맛이, 황홀했다...


 다행히 늦게까지 운영 중인 마을 이자까야에서 맥주와 안주로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숙소 대욕탕(숙소에 딸린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한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 밝아질 도야를 기대하면서.


 새벽 5시. 늘 그렇듯 눈이 떠졌다. 찌뿌둥한 몸을 아침 목욕으로 풀어내고 나니 6시가 조금 넘어섰길래, 숙소 맞은편 세이코마트로 아침 식사 꺼리를 사러 갔다. 6시에 문을 여는 기특한 편의점. 어젯밤 맥주 한잔에 짭짤한 안주 몇 젓가락 먹은 것이 다여서 그런지 속이 허기지면서도 날 선 듯 아렸다.


 HOT CHEF라는 코너에 점원이 막 만들어 내놓은 따끈따끈한 오니기리가 눈에 들어왔다. 쌀밥 양이 많아 보이는 대왕크기 오니기리. 쌀밥은 식감이 재미없고 밍밍한 맛인 데다가 괜히 배를 부르게 해서 다른 맛있는 반찬들을 많이 못 먹게 하는. 잘 안 먹는 음식 중 하나인데. 내 몸이 평소답지 않게 저 따끈한 쌀밥 덩어리를 원하고 있었다. 


 와이파이도시락을 안 들고 온 탓에 파파고 번역을 할 수 없어 한자로 짐작하여 골랐다. 고기보다는 생선류가 좋겠다 싶어서 생선 魚(어) 자가 쓰인 것으로. 편의점 드립 커피 한잔과 북해도산 우유까지 사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입을 크게 벌려. 앙! 하고 오니기리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고슬고슬하면서도 매끄럽고 찰지면서도 부드러운 쌀밥의 매력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몹시 맛있는 연어맛 오니기리! 당장에라도 자는 친구를 깨워 오니기리를 한 입 먹여주고 싶었다...!   


 쌀밥이 이렇게 맛있다고! 맙소사... 쌀밥이 원래 맛있는 건지, 북해도산 쌀이 맛있는 건지, 갓 지어낸 밥이라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쌀밥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감탄하며 몇 입에 오니기리를 해치우고는 따끈한 커피 한 모금, 시원한 우유 한 모금을 번갈아 마시며 숙소 통유리창으로 서서히 밝아오는 도야호수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해가 어둠을 끌고 올라가면서 도야 호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처럼 끝없이 넓지만, 파도가 없어 잔잔한 도야호수. 반듯하고 차분하다. 방금 쌀밥이 가득 찬 내 위장이 저 도야호수를 닮아간다. 반듯하고 차분하게 다져진 그라운드가 몸에 깔린 덕에, 오늘은 흔들림 없이 잘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서 나는, 눈이 되었다가, 쌀밥이 되었다가, 도야호수가 되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있다... 자연의 기운이 강한 곳에서 인간은 저절로 자연을 닮아가게 되는 걸까. 그러고보니 어제 도야 역으로 친구와 나를 픽업하러 와주신 미소 천사 아저씨의 미소가 왜 그리 깨끗하고 선해 보였는지 알 것도 같다. 그 또한 도야호수를 닮아가고 있어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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