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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Apr 10. 2022

드디어 집에 갑니다


한때는 내 집처럼 드나들었던 이곳에서 생애 첫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익숙했지만 낯설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뭘 봐야 알 수 있는지. 습관이 돌아올 때까지 잠시 머뭇거렸다.


공항 출국 표지판을 찾아 위에서 아래로 흩어 내려가다 영어로 인천과 대한항공을 보자 왈칵 반가운 마음이 올라왔다. 이제는 정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이 공항을 거쳐 밥 먹듯 다른 유럽 국가들이나 아프리카로 출장을 떠났던 때가 있었다. 또 다른 시기에는 현실에서 도망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여행을 떠나 돈이 떨어질 때면 돌아오곤 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여정도 이번만큼 설렌 적이 없었다. “제가 몇 년 만에 집에 가는데요”. 공항 수속을 밟으며 항공사 카운터 직원에게 신나게 떠들었다. 그는 이해한다는 눈으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이토록 가슴 뛰었던 적이 있었던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갔을 때만 해도 반년이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얼마 안 돼 중국에서 코로나가 터졌을 때도. 국경이 모두 닫히고 국가 봉쇄를 겪을 때도 길어야 일 년이겠지 했다.


그렇게 이 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났다.


그전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처음 일 년은 프랑스인 남편과 함께 들어갈 수 없다는 점과 이주 동안의 자가 격리 기간에 망설였고. 그다음 해는 남편이 코로나가 아닌 부당한 이유로 해고를 당한 후, 일을 더 해서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떠나지 못했다.


어떡해서든 지금 있는 곳에서 버티고 살아남아야 할 것 같았다. 처음에는 팬데믹 속에서. 동양인들을 향한 일부 이들의 증오와 원망의 시선 속에서. 그 후에는 철저한 현실의 난관 속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과 목표가 되어 온 힘으로 헤쳐나갔다.


그리고 삼 주 전쯤.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도 없고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 이만하면 그동안 잘 버티고 애썼다. 이제 집에 돌아가자. 회사에 보름의 휴가를 내고 한국행 비행기 표를 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항공편은 종종 취소되거나 일정이 수시로 변경되고 있었으며. 그마저 해외 입국자 자가격리 면제가 발표된 후 예약이 꽉 찬 상태였다.


당연히 비행기 표 값은 올랐으며 러시아 영공을 돌아가야 해서 비행시간 또한 늘어났다. 표를 평소보다 비싸게 샀어도. 비행을 몇 시간 더 해야 한다고 해도. 심지어 떠나기 전 두 번의 스케줄 변경 고지를 받아도.


마냥 기뻤다. 집에 간다는 사실이.


그리고 알았다. 내가 사는 곳이 집인 줄 알았는데. 진짜 집은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이라는 걸.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나에게 돌아갈 집은 영원히 한국일 수밖에 없다는 걸. 비행기 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다 떠나기 전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온라인 체크인을 위해 여권 정보를 입력하던 중 만료일이 2022년 1월이라고 적힌 것을 본 것이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순간 지금이 2022년이 아니길 2021년이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모른다.


아닐 거야. 말도 안 돼. 몇 번이고 눈을 크게 뜨고 재차 확인했지만 여권 만료일 2022년 1월이라고 똑똑히 적혀 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지난 이년 반 동안 국경을 넘지 않았더라도 그렇지. 어떻게 여권이 만료되었는데 모르고 있을 수 있었을까.


충격에서 자책으로. 자책에서 떠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으로 대사관에 연락했다. 점심시간이라 여권 담당자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집에서 나와 대사관으로 달려갔다.


비자와 여권 업무를 담당하는 영사관 입구에는 흑인 경호원 아저씨가 지키고 있었고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약속은 잡으셨지요?” 사정을 설명하고 약속을 잡지 못했다고 실토하자 그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정은 안타깝지만 약속을 안 잡았으면 못 들어가요. 밖에 나가서 담당 번호로 전화를 해서 약속을 잡아요.”


“오늘 약속을 잡을 수 있는 거예요?”


“그건 모르죠.”


신호음은 울리기만 하고 답변이 없었다. 체념하고 집에 돌아가야 되나 하는 찰나에 경호원 아저씨가 나와서 불렀다. “사정이 딱해서 들여보내 주는 거예요. 원래는 안 돼요.” 그의 등 뒤로 하얀 날개가 보이는 듯했다.


들어가 여권 담당 직원분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잘못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단단히 혼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오히려 친절하게 그럴 수도 있죠, 라며 긴급 여권 발급을 신속하게 처리해 주었다.


대한민국 국민인 게 자랑스럽고 고마운 순간이었다. 긴급 여권을 받고 집에 들어와 한숨 돌리고 있는데 회사 동료들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여권 만료로 한국에 못 돌아갈 수도 있다는 소문이 그새 회사에 쫙 퍼져서 걱정된 동료들이 연락을 한 것이다.


내가 한국에 돌아간다고 하자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못 들어갈 수 있다고 하자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는 프랑스 동료들. 아니 이제는 동료보다는 친구에 더 가까운 그들의 안심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타지에서 이 기간을 홀로 버텼다고 믿었는데 결코 혼자가 아니었음을. 자주 잊고 살지만 나는 무지무지 운이 좋다는 것을. 내 집은 한국이지만 이곳에서 내가 살아갈 수 있던 이유는 이런 이들 덕분이라는 것을.


드디어 집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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