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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May 08. 2022

마음의 고향, 제주

마음의 고향이 있다. 태어나서 열여덟 해를 보냈지만 그곳을 탈출하기만을 꿈꿨던 진짜 고향도. 혹은 떠난 고향만큼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여전히 이방인이라 느끼는 파리 또한 아니다. 태어나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고향을 하루빨리 탈출하고자 했던 열여덟의 소녀와. 꿈꾸던 도시에서 사랑하는 이와 살며 원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서른여덟의 나. 이 두 여자에게 언제나 따뜻한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곳은 제주이다.


그래서 한국에  때마다 매번 고향에 내려가지는 못해도 제주는  찾았다. 제주 공항 밖으로 나와 야자수가 보이고 바다 지방의 특유의 끈끈함이 몸을 감싸면 마음이 집에   금세 푸근해졌다. 똑같은 한국인데도 서울과 제주는 서울과 하와이만큼이나 달랐다. 이국적이면서도 토속적인. 갇혀있으면서도 열려있는. 어느 계절에 와도 시립도록 마음이 따스해지는,  그리운 이곳.


20대에는 사랑을 하면 제주를 찾았다. '우리 내일 당일치기로 제주도 갈래요' 공항에서 궂은 날씨 때문에 비행기가 계속 지연되는 걸 지켜보면서. 그냥 하루를 공항에서 이 사람과 함께 보내도 좋겠다 싶었다. 그가 가져다준 커피를 훌쩍이며, 코앞에 보이는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정작 혼자일 때가 더 많았다. 그때는 그랬다. 늘 함께를 꿈꾸면서도 대부분 혼자였다. 취미도 특기도 연애라는 발칙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랑이 두려웠다. 관계를 시작하는 법만 알았지, 유지하는 법도 발전시키는 법도 알지 못한 채.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인생을 일찌감치 절망하고, 그보다 더 우울해하며. 섬처럼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나와는 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걷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든 곳도 이곳 제주에서였다. 십 년 전 제주도 올레길을 겨울에 처음 홀로 걷고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자유에 몸서리쳤다. 그때 느꼈던 온전한 행복감은 여태까지 살면서 느끼고 경험했던 수많은 자유의 형태와는 완벽하게 차별되었다. 겨울의 제주는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푸근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살이 떨리는 자유를 걸으며 느꼈다.


이번에 제주에서 걸으며 십 년 전 느꼈던 그 행복과 자유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검은 돌과 푸른 바다의 제주는 아침에 길을 출발했을 때부터 저녁까지 수시로 변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햇살에 반짝이다가. 비가 한바탕 몰려오기 직전의 깊고 검은 바다까지. 느릿느릿 산과 바다와 들을 걸으며 바람과 빛과 파도의 변화를 감지했다. 게다가 유채꽃 흐드러지는 사월의 제주는 얼마나 눈부시게 화사하던지. 이토록 더한 행복이 있을까.                              


무언가를 욕심내거나 달성하려고 애쓰지 않는. 걷는 행위 그 자체로 온전한 행복인. 내 행복이 결코 다른 누군가의 불행 혹은 질투의 대상이 아니며 소비도 오염도 없는 투명하고 순수한 행복이 또 존재할까. 제주의 맑은 바람과 푸른 바다. 사방에 만개한 노란 유채꽃. 비록 진짜 고향은 아니지만 어느새 마음의 고향이 되어버린 이곳에서 삼 년 만에 돌아온 봄을 만끽하며, 수없이 마음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아 행복하다!!!


단 하루였지만 마음에 어느덧 새살이 돋았다. 내면의 회복 능력은 내가 믿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남에 틀림없다. 그러면서 새로운 꿈이 생겼다. 마흔 되는 해 제주에서 일 년을 살아보는 꿈이다. 제주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고루 겪고 바다와 바람과 함께 살며. 더욱 맑고 온전한 내가 되는 것. 그때까지는 다시 힘을 내서 열심히 살아봐야지, 라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비장한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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