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당신이 세상을 떠난 지 백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을 평소보다 조금 더 자주 했지만, 고백하자면 당신이 떠난 후 단 하루도 당신의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문득 당신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하고 싶은 충동에, 당신이 저에게 이토록 중요한 존재였는지 새삼 실감하곤 합니다. 당신이 언제라도 그 가냘프고 투명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반백살 가까이 어린 저에게 꼬박꼬박 존댓말로 안부를 물을 것 같아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제게 주기적으로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는 당신이 무척 외로운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정작 외로운 존재는 당신이 아닌 저였나 봅니다. 걸려오지 않을 전화를 내심 기다리는 저를 보며, 당신을 위해 한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실상은 저를 위한 것들이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다는 말을 홀로 입 밖에 내뱉을 때도 있습니다. 그 말은 응답 없이 허공을 맴돌다 곧 소멸되지만. 왠지 그렇게라도 부르면 당신이 어딘가에서 저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을 것 같아,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당신을 만났을 때부터 곧 끝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든이 훌쩍 넘은 당신의 연세로 봤을 때 그건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믿었던 건 아닌 거 같습니다. 당신이 떠났다는 소식을 믿지 못해 한참을 멍하게 서있었으니까요. 그다음 주에 다시 병원에 입원한 당신을 만나러 가기로 예정되어있었습니다. "보고 싶어요." 어지간해선 속마음을 잘 얘기하지 않는 당신이 몇 달 전 그 말을 했을 때, "선생님, 가을이 오기 전에 찾아뵐게요."라고 했지만 저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가을에 떠났습니다.
찾아뵌다고 했을 때 "아니에요. 이 먼데까지 힘들 게 오지 말아요.”라고 당신은 만류했고, 저는 그런 당신의 만류를 핑계 삼아 당신을 보러 가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머리에서 종양이 발견됐다는 말을 듣고, 그다음 주에 당신을 보러 가야겠다고 결심했지만. 당신은 저를 기다리지 않고 세상을 떠났고, 저는 당신을 보려고 했던 날 당신의 장례식장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장례식이 끝나갈 때쯤 폭풍처럼 눈물을 흘려 장례식장에 있던 당신의 가족과 지인들이 오히려 저를 위로했던 큰 결례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끝까지 이기적이었네요. 그러면서도 꽤나 당신을 위한다고 착각했습니다. 위대한 예술가인 당신의 마지막 기록을 남기기 위해, 불가능한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당신이 떠난 날은 우연찮게도 당신 다큐의 편집이 끝난 날이기도 했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갈 때나 혹은 시골에서 올라온 당신을 만나는 날이면, 며칠 전부터 당신이 좋아하는 떡을 떡집에 주문해서 그날 새벽에 빚은 떡을 들고 갔고. 당신이 그리워하는 한국 반찬을 당신이 살고 있는 산속 마을까지 배달 보내기도 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저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당신에게 늘 주는지. 저는 당신에게 주는 게 좋았습니다. 그냥 주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직전에 촬영차 당신을 만나고 온 제게 당신은 전화해서 미안해하며 말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줄 걸 그랬어요." 그때 저는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함께 보낸 시간이 선물이었어요." 그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지난겨울 눈 내린 깊은 산속 마을에서 당신과 함께 한 며칠이 제게는 선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착각했나 봅니다. 제가 당신에게만은 희생적인 사람이라고. 봄에 당신이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을 때, 제게 전화해서 며칠이라도 특히 밤에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한테도 하지 못한 부탁을 했고, 저는 알겠다고 하고 다음 날 당신을 찾아갔지만. 겨우 그 하루가 끝나갈 때쯤, 며칠 동안 함께 머무는 건 힘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당신이 그 지경인데 바로 올라오지 않는 자식이 괘씸하다는 이유였지만, 돌아보니 저는 당신의 생사를 책임지게 될까 봐 내심 두려웠는 것 같습니다.
이후 당신이 병원으로 옮겨지고 당신을 몇 번 찾아뵈었습니다. 당신의 상태가 진심으로 걱정되기도 했지만, 당신의 부탁을 거절한 미안함을 씻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첫 병문안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날이었습니다. 완연한 봄의 햇살이 세상 곳곳을 비추고 있었고, 병원에 있던 작은 정원에서는 입원 중인 환자와 휴식 중인 의료진들 모두 가리지 않고 밖으로 나와 반가운 햇살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병실은 이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봄을 거부하기라도 하는 듯, 꼭꼭 커튼을 닫고 어두운 병실 안에 당신은 홀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가니 앉을 수 있는 의자를 가리키셨고, 제가 앉으니 당신은 손을 내밀었습니다. 말을 하기도 힘든 당신의 손을 붙잡고 저는 한참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당신 덕분에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처음 당신을 만난 후 제게 전화해서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아닌 여덟 살의 소녀처럼.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면 좋겠어요. 천천히 서로 알아가면서요."라고 했을 때부터. 당신이 전화를 하면 저는 늘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왜 울었냐고 물으셔도 답할 수 없습니다. 아무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당신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감동케 하고, 울게 하는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안부를 묻는 당신의 말에는 늘 건조하게 답했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들킬까 봐 두려웠습니다. 당신은 제가 전화를 못 받으면 음성 메시지를 꼭 남겼습니다. 저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이 음성 메시지를 듣고 또 들으며 다시 울었습니다. 이 메시지들은 하나도 지우지 않고 보관했습니다. 언젠가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데 듣지 못할 때가 오면 들으려고요. 당신이 돌아가신 후 음성 메시지를 파일로 정리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듣지 못했던 음성 메시지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당신이 돌아가시기 두 달 전, 뭔가 다급한 사람처럼 여러 번 전화를 하시고 메시지를 남겼을 때. 저는 하던 업무 통화를 급히 종결짓고 당신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렇게 듣지 못하고 남겨진 음성 메시지를, 당신이 떠나고 나서야 들으며 깜짝 놀랐습니다. "나중에 다시 보자는 인사를 하려고 전화를 했어요.” 당신이 떠난 후, 당신의 음성으로 작별 인사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저에게 미리 작별 인사를 했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그날 새벽. 저는 유난히 자주 잠에서 깼습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평화와 충만과 감사. 온전히 살아있음을 느끼며 유난히 다른 날보다 더 일찍 눈을 떴습니다. 침대에 누워 해가 뜨기 직전의 어두스름한 세상을 창밖으로 보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아 너무 아름다운 세상이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이 자체로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그날 오후에서야 당신이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당신이 떠나기 전에 제게 잠깐 들렸다는 것을요. 그 누구도 주지 못했던 큰 선물을 주었다는 것도요. 그 순간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었지만, 부족한 저는 벌써 잊고 있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당신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며 결심했건만. 벌써 후회할 짓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더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후회의 순간에도 당신을 떠올리는 걸 보면, 당신의 존재는 당신의 부재를 통해 하루하루 커져가는 듯합니다.
당신은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 가까운 지인들도 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에게는 꼬박꼬박 잊지 않고 전화를 했습니다. 궁금했습니다. 당신에게 제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 어떤 존재이기에 잊지 않고 끝까지 기억하는지. 우리가 안 시간은 겨우 이 년. 당신을 만난 횟수는 잘해봐야 열 손가락 안에 들 텐데.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제게 연락하게 하는지. 당신이 가끔 안타까웠습니다. 건조하고 삭막한 저 같은 사람에게라도 연락을 해서 위안을 받고 싶은 외롭고 쓸쓸한 할머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니 어쩌면 당신이 저를 외롭고 쓸쓸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연락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안부를 묻고는 정작 당신은 잘 지낸다며 늘 똑같은 답을 했죠. 제 메일을 인쇄해서 몇 번이고 읽는다고 했습니다. 제 글을 그렇게 읽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당신 한 명뿐일 것입니다. 이 편지도 당신이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여전히, 아니 매일 더 보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제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이제야 당신이 제게 어떤 존재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