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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딘 Nov 15. 2024

돈가스에 생맥주

가끔 지루해 미칠 것 같은 날들이 있다. 평일로 따지면 목요일 정도. 충분히 적응되고도 남은 일상인데 문득 그 ‘지루함’이라는 감정이 피부로 와닿는, 질감을 가진 상태로 나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 날씨를 많이 타는 편이라서 더 그럴 수도 있는데, 그날은 날씨도 매우 흐렸다. 기압이 낮아지면서 내 어깨를 짓누르는 공기가 그날따라 더 눅진하게 느껴졌다. 어디 재밌는 일 없나, 괜히 인터넷도 뒤져보고 그랬던 날이었다.


매니저님이랑 사내 메신저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쌀쌀한 가을 저녁에 어울리는 음식 조합들을 추천해 드렸다. 이를테면 곱창전골에 볶음밥에 소맥, 김치찌개에 계란말이에 소주, 어묵탕에 가라아게에 하이볼 같은. 거기에 추가로 덧붙인 조합은 돈가스에 생맥주였는데 이 조합은 몇 년 전에 친구가 살며시 추천해 준 조합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딱 이맘때였던 것 같다. 11월 중순에서 말 넘어가는 시기. 당시에 전시회 준비를 위해 친구가 설치를 도와주러 나와줬었고 생각보다 설치를 일찍 마친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한 돈가스 가게에 들어갔다. 나름 신사동이었는데도 사람은 거의 없고 한산했다.


가게에 들어온 후 주문을 하려던 찰나, 친구는 슬며시 ‘우리 맥주도 시키지 않을래? 이거 꽤 잘 어울려’라고 말했다. 맥주는 기본적으로 튀긴 음식과 잘 어울리니, 돈가스와도 당연히 잘 어울렸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에 맥주를 곁들여서 그런지, 익숙한데도 생경한 느낌이었달까. 그래서인지 그때 먹은 음식과 맥주 자체보다도 이 조합을 알려준 친구의 목소리가 문득 떠오를 때가 많다. 적당히 쌀쌀하고 어둑했던 가을밤, 그날을 함께 해준 음식은 꽤 소중하달까.


그때의 추억이 오랜만에 떠올라서 회사 근처에 눈여겨 둔 돈가스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생맥주랑 같이 먹겠노라고 함께 결심했다. 퇴근 후에 방문한 가게는 평수가 아주 작고 바 테이블 형식의 가게였다. 메뉴판을 보니 가게에서 직접 생맥주도 팔았다. 너무 많은 양이 아닌 반주로 먹기 좋게 200ml와 350ml 종류로 판매하고 있었다. 무슨 의욕이 솟았는지 350ml 생맥주와 함께 등심 돈가스를 주문했다.

동네 맛집으로 유명한 가게인지라,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가게에 방문했고 자리는 금세 만석이 됐다. 튀김 소리, 따뜻한 조명, 작은 소리로 오가는 대화 소리. 눅진한 지루함은 온 데 간데 사라지고 따뜻한 회복의 시간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혼자 먹는 저녁인데도 외롭지는 않았다. 여럿이서 어울려 먹는 저녁에서 오는 에너지도 분명히 있지만 내가 발견한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억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 지칠 때면 그 공간으로 가서 충전을 할 수 있잖아요.


적당히 쌀쌀한 가을밤, 좋아하는 음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 


아직 모든 게 버거운 사회초년생에게 이런 이벤트를 스스로 선물하는 것도 사치일 수 있겠지만 제 하루는 제가 책임지고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복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거창한 것보다는 소소하게, 잔잔하게, 오래오래. 이런 것들을 곁들임으로써 삶이 조금은 풍성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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