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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딘 Nov 22. 2024

단호박 파이

음식 에세이는 분명히 아닌데 어쩌다 보니 남기는 음식 이야기, 두 번째.


유독 가을에 나는 음식들이 맛있긴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생각보다 많이 없다. 나는 밤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감도 선호하지 않으며, 단호박도 뭐 그다지 잘 먹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음식들은 왜 가공돼서 나오면 그렇게 맛있는 거죠? 그중에 올해 제일 빠지게 된 음식을 꼽으라면 단연 단호박 파이다.


사실 저도 이번 가을에 처음 먹어봤습니다만, 단호박 파이를 즐겨 드시는 분이 계신지? 단호박과 파이의 조합이 낯설긴 한데 이게 꽤나 맛있다(물론 만드는 카페나 빵집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회사의 팀원분이 어느 날 팀끼리 나눠먹기 위해 회사 근처(라고 하기에는 버스로 20분 거리의)의 파이집에서 단호박 파이를 포장해 오셨다. 다 같이 먹는 거니까, 그 자리에서 ‘아 제가 사실 단호박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던 나는 나눠준 한 조각을 먹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냥 말도 안 하고 다 먹어치워 버렸다. 시트는 바삭하고 고소한데, 단호박 크림이 훨씬 더 고소해서 그냥 술술 들어가는 거 있죠. 쓸데없이 가공된 단 맛이 아니라 단호박 자체의 고소함을 끌어올린 크림이라서 더 인상 깊게 먹었던 것 같다. 색깔도 어찌나 예쁜 노란색인지, 이 디저트에 가을이 한 아름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가져오셨는데, 먹을 때마다 너무 훌륭해서 집에 가서도 종종 생각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 집에서 손님을 대접할 일이 생겨서 음식 메뉴를 정하는데 문득 그 단호박 파이가 생각났다. 가을에 어울리는 디저트, 그리고 모두가 좋아할 것 같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SNS로 주문 및 예약 방법을 알아보니 약속 당일이 단호박 파이를 제작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서둘러서 바로 픽업 예약을 잡고 입금을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픽업 당일까지 기다리게 되었다. 오전에 오픈을 하고 모든 메뉴가 다 품절이면 바로 마감을 하는 가게여서 점심시간까지 바쳐가며 픽업을 진행했다.


막상 픽업을 하러 가는데, 예상보다 파이집이 훨씬 멀어서 당황하긴 했다. 버스를 타고 가도 20분이나 가야 했으니까. 그래도 날씨가 좋아서 어디 소풍이라도 나가는 기분이긴 했다. 버스를 타고 넓은 창으로 풍경을 보는데 그 동네는 은행나무가 많았는데, 전부 노랗게 예쁘게 물들었다. 오늘이 지나면 기온이 뚝 떨어지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이 노란색들이 더 찬란하게 느껴졌다. 처음 가보는 동네라 괜히 이 풍경들이 신기하고 예쁘게 느껴 저서 사진도 많이 찍고 가족 단톡방에 보내고 그랬다.


파이집은 아주 작은 골목에 위치해 있었는데, 매장 문이 활짝 열려있었음에도 냄새가 아주 고소했다. 노부부께서 운영하시는 가게였는데 가게 곳곳에는 직접 그린 그림들이 붙어져 있었고 장인 느낌이 나는 각종 기계들도 있었다. SNS도 운영하고 인터넷으로 예약이 가능해서 자연스럽게 사장님은 젊은 나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꽤 반전이었다. 파이를 픽업하면서 보관 방법에 대해 여쭤보았는데 아주 친절하게 답변해 주셨고 ‘하루 지나면 오히려 숙성돼서 더 맛있어요’라며 팁도 알려주셨다. 헤어지는 인사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처음 가 본 동네라서 신기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유달리 날씨가 깨끗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늘은 파랗고 가로수들은 모두 알록달록했다. 작은 주택과 가게들이 즐비했고 사람들이 한적하게 다녔던 그 동네. 그리고 거기에 얹어진 친절과 사랑. 무기력한 낮을 특별하게 바꿔주는 양념.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잎들이 유독 찬란하게 보였던 건 따뜻한 마음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마냥 지루하지 않고 가분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는 이 단호박 파이가 가을을 한껏 머금은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뜻한 가을, 오늘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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