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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창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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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May 06. 2024

창가에서 - 대청소


 감기를 앓으면서 집 청소를 했다. 가정용 에어컴프레서를 이틀 전에 구입했다. 서재의 책들이 앓고 있었다. 먼지. 세월의 찌든 때가 켜켜이 스며 있었다. 하루 종일 감기를 앓으면서 책들 사이에 먼지를 불었다. 남향의 창을 열고 선풍기를 강풍으로 켜고 북향의 창문을 열었다. 공기를 불어 책들의 먼지를 털고 털었다. 간간 기침을 했다. 콧물이 나왔다. 기침을 했다. 먼지를 불었다. 오래된 책들이 한 권 한 권 먼지를 털어내면 옛 시간을 펼쳐 보였다. 책을 읽던 밤, 주인공의 비극, 번역이 어색한 책들, 몇 번이나 탐독했던 책, 나를 황홀경에 빠트린 책, 언어의 마술사들이 풀어낸 시들, 잡설 같은 데 읽고 나면 멍해지는 책. 먼지가 떼를 지어 창 밖으로 날아갔다. 봄날의 하늘은 흐리다 맑았다 했다. 수국이 꽃눈을 뜨고 있었다. 그 위로 책의 먼지들, 거미줄들, 보이지 않지만 어린 거미새끼들도 함께 날아갔을 것이다. 책벌레들도 함께. 묵은 책을 덜어내고 대문 앞에 쟁였다. 봄날의 절정에 먼 산에 흰 아카시아 꽃 장관. 감기를 앓으면서 앓는 감기 증상이 꽃피울 때의 미열이다. 몇 잔의 커피를 마시고, 두유 한 잔으로 하루를 연명하면서 먼지와 오래된 책과 나를 등단시켜 주었던 이승훈 선생을 기억했다. 그리고 선생의 시집을 펼쳐 몇 번 읽었다. 앞서 간 선생. 옛 시절에 미래시를 썼던 선생. 오래되어 누레진 책들을 살피면서 사람들의 생이 꼭 이렇게 된다. 누레지고 맥이 빠지고 흐물흐물해지고 책벌레가 슬듯 영혼에 자질구레한 찌그러기가 낀다. 바람에 힘을 빌리지 않으면 날아갈 수 없다. 죽어서 어딜 가려면 바람에 힘을 빌려야 한다. 그래서, 바람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바람에게 잘 보여야 한다. 꼭 바람의 마음에 들게 내가 서 있어야 하고, 바람의 힘에 허리 숙여야 하고, 바람의 무게에 내 등을 내어주어야 한다. 나무와 꽃나무가 바람의 힘에 기울기를 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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