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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희 Nov 28. 2022

떠나는 가을에게

 


 가을, 너는 겨울 숨의 싸늘함을 견디고 싹을 틔우기 위해 인고하는 봄눈의 간절함을 모른다. 너는 화염처럼 타오르는 태양의 작렬을 맨몸으로 끌어안으며 열매를 키워가는 여름의 고달픔 또한 모른다. 너는 봄과 여름의 노고를 당연한 듯 여기며 무상으로 주어진 수확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기만 할 뿐이지. 


 어미와 형제들을 한날한시에 잃은 저 철없는 것은 네가 뽐내듯 뿌려놓은 노오란 주단 위에서 그 작은 발을 폴짝대고 있구나. 제 어미를 닮았는지 은행잎 냄새를 좋아하나 보다. 잎 하나를 입에다 물었을 뿐인데 세상을 다 가진 듯 의기양양한 모습이라니. 팔 년 전 재순이가 내게 처음 왔을 때 그 모습 그대로다. 혹여나 재순이의 영혼이 저 어린것에게로 흘러든 것은 아닌지. 



 가을, 너는 십 년 전 내게서 남편과 아이들을 빼앗아갔다. 느티나무 단풍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가평의 어느 캠핑장을 다녀오는 길에 그들은 졸음운전을 하던 화물차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 그런데 나는 말이야, 당시에 화물차 운전자를 원망하지 않았어. 울긋불긋 세상을 물들이며 만화경 마냥 사람을 홀리는 가을, 네가 죽도록 미웠다. 너 때문에 그들이 죽었다고 믿기 시작하자 네가 올 무렵부터 몸이 가렵기 시작했어. 내 온몸의 신경세포들이 예민한 촉수가 되어 너의 숨결, 눈빛, 손길 하나하나에 소스라치듯 반응했지. 무슨 짓을 해도 가려움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나는 너를 피해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 년을 두문불출하며 폐인이 된 나에게 재순이가 왔어. 



 그런데 가을, 너는 나에게서 재순이마저 빼앗고 말았다. 내가 너와 맞설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내 곁을 지켜주었던 재순이를 허무하게 데려가 버렸지. 하지만 나는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을 거야. 재순이가 남겨준 저 어린것을 지키기 위해서. 한 번도 겨울의 사나움과 혹독함을 경험해보지 못한 저것에게 겨울을 나는 법을 가르치고 봄눈의 간절함과 여름의 고달픔 또한 깨우치게 할 거야. 그래, 저것의 이름을 ‘가을’이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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