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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예 Feb 12. 2023

할미vsMZ, 혼돈의 마케터 양예주

영화 보다가 지치면 드라마를 보고, 드라마 보다가 지치면 영화를 봐

| 생후 336개월 |
오, 개월이라니? 존나 생소해




욕부터 박고 시작하는 화끈한 퇴사자

따: 요즘 어떻게 살고 있어?

주: X 같습니다. 이런 게 아홉수인가 싶네요. 올해 유난히 많은 일이 있었어. 3년 다닌 회사 퇴사했거든. 심적으로 힘들었어.


따: 퇴사하고 입사하는 과정이 힘들었어?


주: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지? 회사를 안 다니던 원래 나로 돌아가기까지 오래 걸렸어. 직업이라는 게 내 삶에서 엄청 큰 부분이었으니까, 그걸 바꾸는 과정이 크게 오나 봐. 회사가 진짜 너무 빡셌거든. (그가 몸 담은 곳은.. 영화판...) 근데 또 그렇게 돌아온 지금이 원래 내가 맞는지는 모르겠어. 가끔은 전 직장에서 일하던 게 내 모습 같기도 해.


그리고 최근에 다른 데로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는데... (급한숨)하.. 나 사주에서 퇴사하고 나서 꽃길만 걸을 거라고 했거든? 사주 선생님 X발 이게 꽃길입니까? 난 아직 애 같은데. 왜 세상은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는 거지? 난 어른이 아니라고!


따: 어른? 새로 들어간 게 외국계 대기업이라 그런 느낌을 받나?


주: 대기업은 아냐. 한국팀은 6명이야ㅋㅋㅋ


음, 왜 그렇게 느끼냐면, 전 회사는 ‘이상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제정신 박혔다’ 위안 삼고, 일에 미쳐서 버티는 게 있었거든.(그의 전 직장은 전해 듣기만 해도 끔찍하긴 했다) 근데 지금은 나만 멍청이 같아.


따: 왜, 지금은 다들 일을 잘해?


일을 잘하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다들 나보다 연차가 너무 높아. 전 직장에선 내가 실무진 중에 높은 연차였거든. 여기는 리더랑 시니어급만 있고 나만 쥬니어급이야. 이런 상황은 처음 겪어봐. 전 회사에서는 인간에게의 좌절을 맛봤다면, 여기선 업무적인 좌절감을 맛보는 듯해. 처음 겪는 게 많았어.


지금 회사에 내 직무상 상사가 이사님밖에 없거든. 그분이 거의 16년 차야. 나랑 네다섯 배 차이 나는 거지. 내가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그 갭은 뛰어넘을 수 없더라고. 사실 경력을 뛰어넘어서 그만큼 잘하고 싶다는 게 나의 오만인 거 같긴 해.


물론,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나만의 것이 있다고 생각해. 근데 고연차랑 일하다 보면 그게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 그럼 속상하고 화나는데, 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리젝했는지도 납득가버리니까, 그게 진짜... 짜증나지ㅠㅠ.


따: 그럼 배우는 것도 많을 거 같은데?


주: 맞아. 배우는 게 많으니까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있는 거긴 하다.






인디스페이스 기둥 세운 도파민중독 영화광

따: 지금 하는 일(영화 배급/마케팅)은 어쩌다 하게 됐어?

주: 사실 별거 없다? 난 솔직히 별 꿈 없었어. 근데 23살에 중국 어학연수 갔을 때, 혼자 있으니까 영화를 엄청 많이 봤어.


그 이후로 사실 진로에 대한 고민 1도 안 하고 살다가, 대3 때 고민을 해봐야겠는 거야. 다들 하더라고? 그래서 난 뭐 하지.. 했는데. 난 X나 현실도피자거든 + 도파민 중독자. 그래서 뭐 하고 살지 고민하기 싫어가지고 영화관에서 하루 종일 살았어. 하루에 영화 5개씩 보면서. 내가 인디스페이스 기둥 올렸다.


영화 보면 생각이 깊어지는데 생각이 없어지거든.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생각들은 많아지는데, 현실적인 생각들은 덜 해져. 그래서 영화만 엄청 보다가, 그럼 영화로 갈까? 수업이나 들어볼까? 했어. 수입·배급 수업이 있길래 들었어.


그때 수업에 다 취준생밖에 없었으니까, 다들 자소서를 쓰는 거야. 그리고, 한 친구가 나한테 ‘넌 안 써?’해서... 걍 써봤어. 근데 전 직장에 붙은 거야. 운이 좋았지. 물론 거기서 버틴 거는 내 피땀눈물이지만.


따: 영혼이지.


주: ㅋㅋㅋ아, 그런 소리도 많이 들었어. 중문과에 경영학과인데 왜 그런 데 갔니?


따: 그러게 요우커에 경영이면 돈 벌 길이 수두룩 뺵뺵인데.


주: 그래도 이 업계 선택한 건 후회 안 해. 하필 첫 회사로 그렇게 비인간적인 곳에 들어간 걸 후회할 뿐. 지금 하는 일도 재밌어. 난 되게 챌린징 되는 일을 좋아하거든. 잘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너무 스트레스 받긴 하는데, 그만큼 하고 나면 너무 좋아.






할미는 후회 없다

따: 그 일하면서 언제 좋았어?

주: 작품 개봉할 때마다. 내가 만든 카피로 포스터가 나갔을 때, 내가 만든 예고편으로 공개됐을 때. 별 결과가 아니더라도, 내가 영혼을 갈아 넣어서 김종관 영화를 개봉시켰을 때. 사실 언제든, 결과랑 상관 없이 내 최선을 다 했어서 후회는 없었어. 그래서 퇴사해야 했다는 게 아쉽긴 해.


따: 그치, 거기 작품은 좋은데.


주: 그게 진짜 아이러니다.


따: 개봉하면 뭐가 좋은 거야?


주: 두 가지. 세상에 나간다는 것,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 뭐가 더 좋은지는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 거 같아. 내가 별로 신경 못 쓴 작품은 잘 돼도 감흥 없을 거 같거든. 근데 또 신경 엄청 쓴 작품인데 빛을 못 봤다. 그럼 그것도 너무 슬플 거 같아.



따: 반대로, 일에 회의를 느낀 적은?

주: 영화 시장이 죽어간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코로나 타격감이 엄청 컸지. 업계 사람들은 영화를 잭팟이라고들 하거든. 대기업들이 하는 영화 아닌 이상, 중소기업 영화는 하나 터지면 그걸로 10년 먹고사는 거거든. 진짜 하나로 10년 연명해.


2018년 이전에는 전 직장 영화들도 꾸준히 잘 됐어. 근데 코로나 터지고는 잭팟이 없었어. 전 같으면 100만으로 터질 게 30만으로 터지니까.


코로나 때 내가 진짜 열심히 한 영화 있었거든. 2020년 7월 25일에 개봉한 돌란 영화. 그게 1만 겨우 넘었나 그랬어. 근데도 사람들이 ‘너무 고생했다’고. ‘지금 1만이면 예전 10만이랑 똑같다’고 했으니까. 이 시장이 얼마나 힘든지 말 다 했지. 나아질까 나아질까 했는데 나아지지도 않고. 영화는 안 되겠구나 싶긴 했어. 근데 영화 아니면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젠장.



따: 그 일을 하면서 너에 대해 느끼는 점이 있어?

주: 사람이 이렇게 거지 같아질 수 있구나. 괴팍해질 수 있구나. 내가 성질이 개X 같아질 수 있구나.


따: ㅋㅋㅋㅋ너 X같이 굴어?


주: ...엌ㅋㅋㅋㅋ 사실 나는 일과 사람 중에 택하라면 일을 택할 거 같아. 인간에 대한 존중과 일의 진행 사이에서 좋은 균형을 못 찾는 거지. 일 잘하는데 싸가지 없는 사람 VS 일 못하는데 착한 사람이 있다면, 예전도 지금도 차라리 일은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근데 그러다 보니까 당장 일 잘되게 하는 게 중요해서 인성 놓고 나면, 항상 반성하게 되는 거지. 이렇게 살아도 되나.


따: 둘 다 가질 순 없어? 둘 다 가진 사람 본 적 없어?


주: 없어. 넌 있어?


따: 인성 포기했다-느낌 아닌데도 잘하는 사람 본 거 같아. 인성 좋은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잘하는 거 같고.


주: 하긴, 나도 이번 직장 와서 그런 태도 많이 배우긴 했어. 폴라이트하고, 익스큐즈 하는 거. 근데 업계의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니까 업체들이 날 호구로 보나 싶을 때가 생기더라. 진짜 그런 생각하기 싫은데, 착하게 하면 우습게 본다는 느낌 확 오거든. 에휴.







내가 만든 꾸끼...는 내 능력일까 운빨일까

따: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너한테 어떤 의미야?

주: 내가 올해 그거에 대해서 진짜 많이 생각을 해봤거든? 사실 나는 그 전엔 일 안 하고 잘 살아왔잖아. 근데 이제는 일을 빼면 나한테 아무것도 안 남는 거 같은 거야. 맨날 일 생각만 하고, 일 때문에 엄청 기뻐했다가 엄청 좌절하고. 무슨 애인이냐고. 사실, 난 노동 안 해도 된다면 절대 안 할 거야. 노동이란 게 내 가치를 찾아주면서도 시간과 자아를 엄청 뺏어가잖아.  내가 아무리 영화를 좋아해도… 그냥 보러 가지, 이 산업에 종사하진 않을 거야. 근데 주변 업계 친구들은 돈이 많아도 이 ’일‘을 하겠대.


어쨌든 노동을 해야되는 게 디폴트라면, 내가 지금 일에서 최고로 가치를 두는 건 돈, 명예, 자아실현 중 자아실현 같아. 일이 내 가치를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 사실 대학 때만 해도 굳이 내 가치를 증명할 필요는 없었거든.


근데 뭔가 이제는...


(급초롱)


맞아! 내가 쿠키가 된 기분인데. 빵을 만들려면 존나 섬세한 온도 조절과 버터 몇 그램까지도 조절이 필요하잖아. 내가 사회에 나오기 전까지는 반죽하고, 숙성하는 과정이었어. 근데 이제 오븐에 들어가는 거야. 컨베이어 벨트에 찍어내는 쿠키들처럼.


구우면 완성도가 보이겠지? 근데 구워보니까, 똑같은 틀을 찍은 거 같은데도 잘 완성이 되냐, 안 되냐가 달라. 사실 맛있는 쿠키가 되는 건 운 같기도 하거든. 그럼 내가 운이 없나보다 하다가도, 혹시 내가 몇 그램을 잘못 넣었나? 온도 설정을 잘못했나? 싶어. 근데 옆에 있는 애도 똑같이 했는데 멀쩡해. 그럼 또 운빨 같고.


내가 잘못한 거 같다가도, 나만 잘못된 거 같다가도, 어떨 때는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싶고. 그래서 일이 처음에는 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작업이었는데, 사실 지금은 잘 모르겠어. 내가 애쓴다고 가치가 증명되는 건가?


따: 왜 자꾸 운이 없다고 하는 거야? 스스로 못난 쿠키라고 생각하는 거야?


주: 음, 그건 실제 직장&커리어 얘기야. 사실 지금 회사가 퇴사하고 쉬다가 우연히 소개받아서 잠깐 일하려던 거거든. 그래서 사실은 다니면서도 이직하려고 서류를 많이 넣었는데, 대기업에서 계속 떨어지는 거야. 3년 전엔 전 직장에 붙은 거 자체가 운이었다고 생각했어. 내 친구들 다 떨어졌는데 난 준비 안 하고 붙었으니까. 근데, 지금은 그 회사를 원망하기 시작한 거야. 내가 그 회사를 안 다니고 좀 더 잘 준비해서 처음부터 좋은 회사에 들어갔으면, 더 탄탄대로였을까. 생각 들거든.


몰라. 암튼 내 친구들도 '이직은 운이야. 좀 더 기다려봐' 하긴 해.






할미 vs MZ, 충돌 속에서 나오는 인사이트

따: 일 안 할 땐 뭐해?

주: 영화와 드라마를 봐. 딴건 잘 안하는 거 같아. 내가 이 판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난 영화를 보다 지치면 드라마를 보고, 드라마 보다 지치면 영화를 봐. 도파민 중독자지? 그러다보면 내 삶 무슨 의미지 싶어. X나 영화와 드라마로만 점철된 삶.


따: 그러게. 넌 일도 영환데. 진짜 점철됐네.


주: 그래서 가끔씩은 궁금해. 다른 사람들은 뭐하고 사나. 근데 진짜 알고 싶은 건 아냐ㅋㅋㅋ 뭔지 알지.


따: RGRG. 근데도 영화 드라마가 여전히 좋은 이유는 뭐야? 여전히 현실 도피?

주: 응. 그래도 요즘 영화랑 거리두기 중이라, 엔터테인을 목적으로한 영화만 보는 거 같아. (거리둔다며?) 진짜 아무 생각 안 나게끔, 오직 즐겁게만 할 수 있는 것들 아니면 안 보는 거 같아.


그러다보면 현타가 오지. 좀 다양한 걸 보고, 내 시야를 넓히고 깊은 인사이트를 가져야하는데, 그게 필요한데 회피하는 느낌이어가지고. 나는 업계 종사자라 어쩔 수 없다고 느끼면서도 죄책감 들고 힘들어. 가끔은 이런 걸 힘들어하는 내가 계속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지.


따: 나도 영상하는데 유튭 안 봐ㅠ 이러다 도태되면 어떡하지.


주: 난 마케팅이라 더 그런 거 같아. 그러다보니까 내가 마케팅이 어울리는 사람인가 싶은 거야. 난 X나 뒷방 할미이고 싶거든. 할미 자아는 ‘그게 대중이여? 할미는 모르겄는디. 오래된 명작이 좋은 것이여~’ 하는 생각이 솔직히 아직 있거든. 근데 트위터나 인터넷 커뮤니티는, 풀은 좁고 대중문화는 아니지만, 거기서 결국 메이저로 나오는 게 많잖아. 어쨌든 트렌드고.


마케터는 트렌드를 따라가야하는데 내 안의 할미가 자꾸 ‘그게 증말 좋은거여?’하고 질문해. 둘이 화해를 못 하고 충돌만 하니까, 마케터라는 직군이 내 성향에 맞나 싶은 거지.


물론 그 둘의 충돌 속에서 어쨌든 마케팅을 해내는 내 인사이트가 쓸모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그래서 이 일을 계속 하고 있는 것도 있지. 아니었으면 영화 쪽에 들어와서 직무를 바꿨을 거 같긴 해. 그러니까 애써 X발 MZ.. 이러면서 쫓아가는 거지.


지금도 이런데, 나이 들면 얼마나 심해질까? 내가 그때까지 꼰대가 안 되고 버틸 수 있을까?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나는 윗사람 밖에 없어서 맨날 보잖아. 물론 지금 있는 사람들이 엄청 꼰대는 아니지만, 가끔 자기 생각을 너무 믿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거든. 연차와 연륜을 무시할 순 없지만, 나도 내가 정답이라고 믿어버리면 어떡하지?


따: 너가 진짜 그럴까?


주: 그럴 거 같아. 그래서 무서워.


따: 왜 그럴 거 같아ㅋㅋㅋ


주: 걍 느낌이 와. 그래서 항상 자기검열을 해야하는데 자기검열 할수록 작아지는 거지. 곹통임.






인생 영화 & 영화인의 인생

따: 인생 영화 하나만 꼽을 수 있어?

주: 하나..? ...장르별로 꼽으라고 하면 해볼게.


따: ㅋㅋㅋㅋㅋㅋㅋㅋ그럼 세 개.


주: 아, 근데 그건 있다. 나는 내가 <우울할 때 항상 보는 영화들의 단계>가 있어.

1. 조금 우울하고 희망을 찾고 싶을 때 : 지브리 영화

2. 거기서 좀 더 우울하고 다 싫을 때 : 타란티노 영화. 바스터즈 같은. 다 X나 깨부수는.

3. 진짜 우울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 본투비블루


따: 1,2,는 알 것도 같은데... 본투비블루는 왜?


주: 본투비블루는 사실 되게 절망적이거든? 쳇베이커의 이야기인데. 백인 쳇베이커가 흑인 위주의 재즈 신에서 어떻게 역경을 뚫고 성공했는지와 그의 기구한 삶을 동시에 다뤄.


제일 울림이 컸던 건 마지막 장면이야. 쳇 베이커가 마약에 중독돼서 아무것도 못 하다가, 애인을 만나 사랑을 하면서 마약을 끊어내고, 재기해서 무대에 서는 순간이 오거든. 무대에 오르기 전에 마약 없이 무대에 설 거야-하는데... 이 사람은 이미 약이 없으면 무대에 못 서는 지경인 거야. 극복한 줄 알았는데 안 됐어. 그래서 결국은 마약을 하고 무대에 서지.


근데 그 모습을 무대 아래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지켜보고 있어. 그 사람은 알지. '얘가 마약을 했구나.' 그때 둘이 주고받는 눈빛이 너무 기억나. 그리고 극복의 무대에 오르는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주인공. 잊혀지지가 않아. 그 마지막 장면 때문에 그 영화를 너무 좋아해.


따: 캬... 역시 ㅅㅣㄴㅔㅍㅣㄹ....


주: 왜요^^^^? 영화忠 같나요?


따: 영화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건 어때?


주: 사실 그 전엔 딱히 만나는 사람 없었고. 그나마 지속적으로 연락하는 사람이 너희뿐이었다면, 빈도가 옮겨갔다- 정도? 그리고 비슷한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 만나는 거 당연히 좋지, 뭐. 내가 ‘아‘만 해도 ’어‘ 알아듣고 그런 게 있잖아. 너네도 그런 게 있을 거고. 당연하지, 뭐.


따: 일로 만난 사람이랑 친구가 되는 경우 많아?


주: 일단 여긴 네트워킹이 중요하긴 해. 업계 자체가 너무 좁고, 건너 건너 다 알거든. 고립되거나 인싸가 되거나 둘 중 하나야. 난 어쨌든 전 회사 다닐 땐 이직을 위해서라도 고립되면 안 됐었어. 그리고 이직 아니더라도, 그냥 그때 그때 업무를 위해서도 필요한데, 전 회사에서 나 네트워킹 진짜 안 시켜줬거든. 그래서 독고다이 했지. 근데 업계 사람은 업계 사람인 거 같아.


따: (전 직장 파르르....) 떠올리기 싫으면 말 안 해도 괜찮은데, 전직장 다닌 3년 돌이켜보면 어때?


주: 이 시기에 퇴사하길 잘했다? 딱 좋은 시기에 잘 나온 거 같아. 물론 내가 거길 아예 안 거치고 다른 데를 구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나름 나도 얻은 게 있고. 생각해보면 배울 게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배운 건 허튼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근데 더 있을 가치가 있었냐하면 그건 또 아니고.


 따: 왜?


주: 더 있었으면 나는 반송장처럼 살거나, 진작에 뒤졌거나 둘 중 하나일 듯.


따: 맞아. 더 다치기 전에 잘 나왔어


주: ㅇㅇ. 자기위안일 수 있는데, 딱 맞는 시기에 잘 나온 거 같아.



<born to be blue>, 2015



중도를 찾자. 중간의 중간 밖에 못 가더라도.

따: 서른이 되는 기분은?

주: 자신의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들 있잖아. 난 그런 타입은 아닌 거 같고. 오히려 얼마나 나락까지 갈까.


따: 왜ㅠㅠ! 갈 거면 같이 가.


주: 나는 앞자리가 바뀌어도 여전히 응애거든? 근데, 가족이고 주변이고 뭔가 기대하는 거 같아. 나한테 서른이 큰 의미가 있냐고 하면 모르겠는데도 싱숭생숭해져. 괜히 뭔가 달라져야 하는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도 드는데.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니?


내 삶의 목표가 '항상 중도를 찾자'거든. 나에게 있어서 중도를 찾는다는 건 이 입장도 이해하고 저 입장도 이해하고, 더 폭넓게 보고 그 중도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는 거거든.


인간은 퇴화하기 마련인데(텅빈 눈)... 끊임없이 그런 걸 생각하고 더 넓은 폭으로 이해하고 중도를 찾을 수 있다는 게, 엄청 큰 사람이 되는 거 같아. 근데, 보통은 나이가 들수록 한쪽으로 치우치고, 지 주관만 깊어지잖아. 엄빠 봐도 그렇고. 사실 나는 엄빠처럼 되고 싶지 않은 것도 커. 그러니까 중도를 열심히 찾으면서 사는 게, 내가 그들을 벗어나서 좀 더 성장하는 길이지 않을까? 암튼, 내 인생 목표는 중도를 찾자.


근데... 애초에 중도를 찾는다는 건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에...  나는 중도의 반만 가도 잘한 인생이다. 싶어.


따: 그래서 네가 자기검열이 심한 걸까?


주: 그럴 수도






지랄도 힘든 일이야

따: 너의 20대는 어떻게 흘러간 거 같아?

주: 걍 흘러갔는데...? 정신 차려보니까 대학 와있고, 정신차려보니까 중국 가 있고, 정신 차려보니까 일하고 있어. 내 뜻대로 막 뭘 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먼저 달려든 건 별로 없었던 거 같아.


20대 초반엔 너무 가족한테 휘둘렸고, 20대 중반엔 길을 못 찾고 휘둘렸고, 20대 후반인 지금은 그냥 휘둘리고 있어. 그냥 존나 휘둘리는 삶을 살았고여. 누가 20대는 어땠어요? 하면 완성되지 못한 시기 같다고 답할 듯. 다들 취업을 하는구나. 나도 취업을 해야겠네? 자소서를 쓰는구나. 나도 자소서를 써볼까? 취업이 돼버렸네. 다녀볼까? 회사에 다녀야겠네. 버텨볼까? 버티고.



따: 그럼 20대 초반에 만난 사람들이 너에 대해 한 말 중 기억에 남는 거 있어?


주: 20대 초반? 초반엔 사실 대학에서 만난 언니들인데... 나는 사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가지고 너무 생소했어. 근데 난 또 자기 주관이 되게 세잖아? 그러니까 그 언니들이 날 휘두르는 게 싫었어. 언니라이팅을 좀 했거든. '언니 말 들어야지' 이런 거. 사실 그냥 재수생 언니고 한 살 많은데. 그땐 그게 되게 커 보였단 말이야? 안 그래도 모든 게 처음이고 어렵고 새로운데, 그러니까 더 정신을 못 차렸던 거 같아.


막내 취급이 좋으면서도 싫었지. 내가 뭘 항상 챙겨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챙김을 받는다는 게 좋았고, 그러면서도 내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게 짜증 났지.


따: 그럼 요즘은? 요즘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선 어떤 사람인 거 같아?


주: 글쎄. 안 튀려고만 해서 잘 모르겠는데. 대체로 말을 아끼려고 하는 편이야. (왜?) 걍… 어딜가든 좀 이제는 좀 나를 안 보여주려고 하는 거 같아. 나이 들어갈수록. 뭐든 적당히 하려고 하고. 적당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거 같아. 그게 편하니까.



따: 어릴 때, 10대 땐 어떤 애였어?

주: 가족 때문에 힘들었어. 내가 왜 그렇게까지 엄마 아빠 말을 들었나 싶은 생각도 지금은 많이 들고. 그렇게 잘할 필요 없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너무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너무 깊게 가니까, 오히려 다 잊어버리려고 했던 게 커. 지난날들의 기억은 감정이라는 잔상밖에 남아있지 않아. 그래서 지금 그때를 떠올려보면 기분이 더러워. 미숙했던 아이지, 뭐. 지금의 나랑은 너무 다른 거 같은? 부모가 가스라이팅해도 가스라이팅인줄 모르고. ’예주 착한 아이야‘ 그럼 그냥 내가 착한 줄 알고, 더 착하게 굴려고 하고. 근데 지금의 나였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들을 그때는… 했지. 인생을 걸고.


따: 어떻게 해서 그런 너와 달라질 수 있었어?


주: 그냥… 점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가고. 가족하고 분리되면서.


아, 가족과 분리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 고등학교 때, 엄마가 교회 가래서 내가 싫다고 한 적이 있거든. 그때 엄마가 ‘너 그럼 지옥 간다’ 했어. 근데 그게 너무 배신감이 드는 거야. 그전까지는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애였는데, 그때 처음으로 이런 착한 나의 의견을 묵살해버리는 어른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이 생긴 거 같아.


아빠가 한 폭력은 어차피 내 능력 밖이라 오히려 논외였던 것 같고. 엄마의 말은 내가 들어줄 거라고 생각한 범위 안의 것이었는데, 그걸 거부당한 게 배신감이 컸지. 그때 그 말을 듣는 순간, '부당하다' 느꼈지.


따: 그렇게 자라서 20대 초반에 제일 많이 했던 생각은 뭐야?

주: 엄마는 나한테 왜 이럴까. 왜 나를 자꾸 어딜 보낼까. 나를 중국으로 보냈을까. 왜 나를 구속하지 못 해 안달일까. 와 진짜 그게 제일 컸던 거 같아.


따: 그 질문에 대한 소결론이 있었어?


주: 그 사람도 그의 시대적 배경과 가정환경이 있으니까 그럴 수 있겠다. 물론 나를 더 이해해주고 사랑해줬다면 좋았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난 나의 길을 가자. 더 이상 노력해서 될 게 아닌 거 같더라고.


고등학교 때 엄마한테 상담받으러 가자고도 했거든. 그때 ‘안녕하세요’ 같은 프로그램 있었잖아. 내가 볼 땐 우리가 이상한 거 같은 거야. 어떤 수준이었냐면, 초등학교 바로 건너편에 엄마 부동산 사무실이 있었어. 근데 엄마가 나 하교할 시간을 기다려서 나와 있는 거야. 그래서 엄마가 나를 감시하는 게 싫어서 뒷문으로 가. 그럼 전화가 와. 왜 안 나오냐고. 난 그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따: 왜 그러냐고 해봤어?


주: 애라서 걱정된다는데 뭐라고 해. 그러니까 머리 크고 나서는 항상 감시 속에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너무 답답했어. 내가 딱히 탈선할 사람도 아닌데. 그냥 앞문 말고 뒷문으로 간 건데. 중학교 때도 내가 그 앞길로 가지 않거나, 뒤쪽으로 가거나 하면 항상 전화가 오고. 좀 심했어. 감시와 통제 속에 꿋꿋이 살아남은 반항아. 잡초 같은 새끼야, 난. 그 잡초는 예술업을 하겠다고..


따: 더한 잡초가 됐네


주: 그니까


따: 10, 20대 때 부러웠던 사람이나 사람의 특징 있어?

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가스라이팅 했거든 ‘너는 감사한 줄 알아라’. 나도 내가 부족하게 자랐다고는 생각 안 해. 감사하지. 나보다 부자인 사람들을 동경하거나 그런 건 없었으니까. 그냥 좀 자유롭게 사는 애들이 부러웠을 뿐이지.


따: 지금은 안 부러워?


주: 딱히 부럽진 않아. 나도 나름 내 살길을 찾았고.


따: 그럼 지금은 벗어났다고 느끼는 건가?


주: 그건 사실 잘 모르겠는데, 일단은 가족들이 내 눈치를 보는 단계까진 왔어. 내가 하도 지랄을 했어서ㅎㅎㅎ 못 견디겠다고 집도 나가보고, 많이 싸우기도 했고. 가끔씩 싸울 때 옛날의 케케묵은 감정들이 막 올라와서 힘들긴 하지. 그래도 내 나름은 균형을 찾은 거 같아. 이맘때 보통 오는 결혼이나 연애에 대한 압박은 덜 받고 사니까. 부모님들 입을 닫아버렸지. 사실 일하고 밖에 나가 있고 하면 부딪힐 일이 많이 없어.






우린 왜 애정이 필요할까? 못난 인간에게 조차말야.

따: 20대 때 너한테 가장 큰 결핍은 뭐였던 거 같아?

주: 애정 결핍이 있나 싶었어. 나 사람 되게 싫어하잖아. 피곤해하고. 혼자 있는 거 좋아하고.


‘나 애정결핍 있나’ 딱 느낀 건, 전 직장 있을 때야. 내가 처음에는 되게 못난 거 같고,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 다들 날 갈구니까. 근데 거기에 상처받는다는 건 내가 이 사람들에게 애정을 바란다는 거기도 하잖아.


따: 그치. 그 사람들한테도 인정받고 싶었어?


주: 감정적으로, 사람 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어. 근데 그게 안 됐어. 좌절했어. '난 이상한 사람인가. 아 X발, 아니야. 이 인간들 이상해.' 그 혼란 속에서 찾은 탈출구가, '일로라도 나를 존중할 수밖에 없게 만들자'였던 것 같아. 어쨌든 지들 일 굴러가게 만드는 사람을 내칠 순 없을 테니.


근데 좀 일하다 보니까, 거기에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서 바깥사람들 만나고 일 성사시키면 그들의 애정이 다 필요 없어졌지. 그럼 또 '애정'이 필요한 건 아닌가 싶었어.


사실, 그땐 너무 극단적으로 왔다 갔다 했지. 내가 X나 못난 놈인 거 같았다가, 나만 제대로 된 놈인 거 같았다.. 했는데. 정리하자면, ‘나는 이들과 달라’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쨌든 이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인정욕구가 강했나? 애정 결핍이 있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 난 스트레스 상황의 원인을 내게서 찾으니까. 매번 환경 탓을 하면서도, 혼자 생각할 때 근본적인 문제는 내 안에서 찾거든. 그러니까 ‘내’가 애정결핍인가? 이런 식으로. 나에게서 문제점을 찾은 거지. 그 복잡한 게 퇴사하고 나서 확 내려갔어ㅎㅋ.


따: 그런 상황에 있으면 자꾸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생각하는 거 같아ㅠㅠ 진짜 너무 고생 많았다.


주: 근데, 내 감정적 회피는 어릴 때 가족에서 비롯된 거야. 그건 분명해. 오랫동안 쌓여온, 어쩔 수 없이 가져가야 할 평생의 숙제고. 그걸 아는데, 다 X까라 하고 살 순 없으니까 상담도 받고 했지.


근데 생각해보면, 난 사람들하고 어울려야 하는 시간에는 곁다리에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런 날 보면서는, 내가 사실은 되게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고 애쓰는 사람인가 싶기도 해. 여전히 그렇게 애쓰는 건 피곤한 게 더 크지만, 갈수록 사람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고, 내가 사람을 좋아하나라는 의문이 커지는 거 같아. 20대 중반에는 내가 내 세상의 전부인 거 같았다면, 20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그게 아닌 거 같다. 나도 누군가가 필요하겠구나 싶은 느낌.


따: 그럼 지금은 그 결핍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주: 회사 옮기니까 또 아닌 거 같아. 그냥 귀찮고, 알아서 처리했으면 좋겠고. 일단은, 모르겠고 그냥 지친 거 같아. 나는 무엇이든 내가 세워둔 기준치에 못 미치면 포기하거나 놔버리거든. 그래서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쏟는 거에 비해 돌아오는 게 없다고 느꼈을 때, 나는 항상 그거를 회피하고 멀리하고 놔버렸는데… 그게 맞나? 회피형 애정결핍인가 생각도 들지만, 그렇게까지 분석적일 필요가 있나 싶고.


따: 그렇게 고민이 많다는 건, 넌 사실 관계를 끊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다고 느낄 때도 있어?


주: 그 사람이 나한테 똑같은 애정을 주지 않더라도 그냥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잘 됐으면 좋겠으니까 해줘야지 이럴 때.


문제는 뒤돌아서는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해. 그래서 나는 내가 애정이 많으면서도 아예 없는 인간 같기도 해.


따: 지금, 혹은 앞으로의 너는 회피 안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주: 지금 직장에선 사실 내 위치도 애매해서, 열의가 더 사라지는 거 같아. 난 내가 주체적으로 뭔가를 끌고갈 수 있을 때 좀 더 뭔가 불타오르는 사람 같거든. 나한테 뭐라도 쥐여줬을 때 진짜 강한 책임감으로 다 해내야돼-하는 게 있단 말야. 그래서 불타거든. 근데 차라리 내가 정규직이 돼서 하나라도 내가 좀 더 장기적으로 끌고가서 성공시키면 되겠다는 게 있으면 지금 느끼는 무력감은 안 느꼈을 거 같거든. 어차피 계약직으로 기한이 정해진 상황에서 ‘얘네 좋은 일만 하고 나가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드니까. 물론 그러면서도 열심히 하고 있는 내가 싫어.


근데 어쨌든 지금 내가, 예전처럼 와 나새끼 후회 없이 열심히 했다-고 할 만큼 안 해. 내 모든 걸 다해서 열심히 했다, 후회 없겠다,고 할 때까지 날 갈아 넣어야 하는데, 내가 그걸 할 필요도 없고 그럴 위치를 안 주니까. 거기서 오는 좌절감이 있지.


그렇다고, 내가 다른 데 가서 내 영혼을 갈아서 일을 한다고 얻는 게 있을까? 사라지는 건 인간관계뿐이던데. 내 소소한 만족감을 위해 굳이?


따: 나도 애정과 인정 욕구, 성취감이 얽혀있는 거 같긴 해. 그럼 지금은 널 채우던 성취감이 사라진 상태인 건데, 허하진 않아?


주: 타격이 없진 않은데, 아주 우울하진 않은 거 같아. 운동도 하고 있고. 그 전 회사에 비해서 워라밸을 찾고 싶은 것도 맞거든. 요즘은 깊은 생각은 안 하려고 하는 것 같아 스스로. 요즘에는 우울해지려고 하면 그냥 운동을 많이 하는 거 같아.


돌이켜보면, 그동안은 그걸 일로 채웠어. 일에서 만족감을 다 얻으면서. 그건 내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거였으니까. 날 갈아 넣어서 몰두한 거야. 그래서 연애나 그런 거에 관심도 없었지. 일에서 얻는 만족감만으로 엄청 충분했거든. 내가 전 직장 나오길 주저했던 이유가 ‘여길 나가면 다신 이렇게 못할 것 같아서’도 있었어.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할 수 없을 거 같으면서도, 그때의 내가 너무 부러워. 막 가슴 뛰고. 그때 일했던 나를 생각하면 너무 즐겁고. 근데 앞으론 그때처럼 모든 걸 바쳐서 할 수 없을 거 같아.


따: 왜?


주: 그럼 죽지 않을까?


따:(숙연)


주: 그럼 이제는 다른 데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데 다 재미가 없단 말이야. 사람으로 채워야 하나? 그래서 요즘 ‘연애를 해야되나?’라는 생각이 드는지도. 사람으로도 채워보고 이거저거 채워보면서 살겠지.






생각? 지치거나, 정리되거나, 둘 중 하나여.

따: 운동은 뭐해?

주: 점심 때 필라테스 가거나, 계속 걷거나.


따: 산책 좋아하지?


주: 응. 하루에 1~2시간은 걸어.


따: 걸으면서 뭐해?


주: 음악 들어.


따: 언제부터 그렇게 많이 했어?


주: 퇴사하고 나서부터. 그때는 하루에 4시간씩 했어. 낮에 두 시간 돌고 밤에 두 시간 돌고.


따: 걸으면서 생각해?


주: 생각하기 싫어서 나오는 거야. 근데 정리가 돼. 난 엄청 감정적인 사람이라서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생각이 막 나잖아. 사실 방에 가만히 있으면 그게 잘 안되거든. 예전에도 그래서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본 것도 있고. 그걸로만 안 돼서 나간 것도 있어.


따: 산책 루틴은?


주: 요즘은 필라테스하면서 운동하니까 그 운동력을 잃지 않으려고 나가는 거고. 가끔씩은 갑자기 너무 우울해져서, 뭔가 막 가라앉는 기분이 드는 거야. 그럴 땐 그냥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일단 나가. 무엇이든 정리될 때까지 존나 걸어.


따: 도움이 돼?


주: 돼. 지쳐서 아무 생각이 없어지거나, 무언가는 정리가 되거나. 둘 중 하나는 돼.



Marketer | Yeju Yang

따: 스무 살 때랑 지금이랑 달라졌어?

주:많이 달라졌어


따: 뭐가 제일 많이 달라졌어?


주: 뭔가 덜 흔들리는 사람이 된 거 같아. 물론, 여전히 흔들리고 있긴 해. 근데 메트로놈 개빨랐던 게 좀 미디엄 템포 정도로 온 거 같아. 아무것도 모르고 주변 따라서 이게 옳은가? 저게 옳은가? 그때는 X나 흔들렸는데.


그러면서도 의심이 든다. 지금 덜 흔들리는 게, 내 주관이 확실해지는 단계에 들어섰나 싶고. 그런 생각 들면 예전이 좋은 것 같기도 해. 그래서 항상 중도를 찾아야 한다.


따: 영화 관련 다른 직업은 생각해본 적 없어?

주: 안 그래도 많이 해봤는데... 유통 관련, 배급 쪽도 있고, 기획, 작가 찾아서 시나리오 작업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현장도 있고. 다 생각을 해봤는데, 아닌 거 같아. 내 거 그 역량이랑은 다른 거 같아. 예술을 진짜 만들어내는 일 쪽은 내 일이 아닌 거 같달까.


그러니까, 기획 - 현장 - 배급 마케팅이 있잖아. 씨뿌리고 - 키우고 - 열매 수확하고. 근데 나는 전 단계는 내 영역이 아닌 거 같아. 나는 지금 일 재밌어. 아무리 감독이 만들고 배우가 연기한다고 하지만, 그걸 세상에 내놓는 건 나야. 파는 것도 나고.


따: 맞아, 결국 대중에게 연결해주는 사람은 넌데.


주: 카피 쓰고, 예고편 만들고. 다 내가 만들어~ (당당) (자부심 가득) 난 만족해, 내 직업에.






오늘까지의 나는 최선이지만,
오늘 한 번 더 생각하면 내일의 나는 조금 다를지도

따: 20대의 장소를 하나 꼽으라면?

주: 중국 서안. 거기에 있는 동안은 현실에서 떠나서 붕 떠 있는 느낌이었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짜증 나는 것들에서 자의는 아니고, 억지로 보내진 건데. 오히려 그게 좋았던. 내가 선택한 회피면 괜히 죄책감 같은 게 들 수도 있는데, 주어진 회피니까. 좋았지.


따: 뭐했는데 거기서?


주: X나 많이 먹었지


따,주: ㅋㅋㅋㅋㅋ


주: 생각도 많이 했고. 그때부터 걷기를 많이 했던 거 같아. 영화도 엄청 많이 봤고.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게 너무 좋았어. 가서 배운 것도 많고, 나중에 내가 중국에 보내진 이유를 알고는, 배신감으로 인생의 쓴맛을 배운 것도 있고.


따: 10, 20대 중 돌아가서 바꾸고 싶은 하루가 있어? 눈 딱 떴을 때 그날 아침인 거야. 그래서 작은 뭔가를 바꿀 수 있는 하루가 있다면?

주: 음... 아빠가 나 때렸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따: 가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주: 가서 같이 때리든가? 집 나가든가?


나는 네가 이렇게 물어보기 전까지 사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 돌아가서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마다 화나긴 했는데, 표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거 같아. 근데 돌아간다면… 지금의 나라면 끝까지 개겼겠지.


지금의 나는 그 못 개긴 날 이후를 살아왔잖아. 사는 내내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나를 얽맸기 때문에, 그때의 내가 끝까지 개겼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됐을까도 상상해볼 수 있거든. 만약에 그때 제대로 개겼으면, 난 지금보다 더 당당하고 더 멋진 여성이 돼 있었을 거 같아.


따: 멋지다. 눈물 난다.


따: 10, 20대 중 돌아가서 다시 누리고 싶은 하루. 눈 딱 떴을때 그날 아침인 하루는 있어?

주: 없어. 난 지금의 내가 제일 나아. 많은 생각을 거쳐서 여기까지 온 거기 때문에. 언제든 어차피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하지만 그 상황을 되돌려서 다른 선택이 있을까,라고 그냥 생각해보는 게 더 다른 내일의 나를 만드는 거 같아. 사람 다 똑같지 않아? 어차피 그때의 나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근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봄으로써, 내일의 나는 조금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겠지.


따: 그럼 내일, 모레, 글피...의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주: 웃긴 게, 입사했을 때 똑같은 질문 받았거든. 그때 내 대답이 ‘구교환 영화 크레딧에 오르는 거요’였어. 9개월 만에 올랐지. ‘그 다음 목표가 뭐니? 했을 때, ’유태오 크레딧에 오르는 거요.‘ 올랐어. 그럼 ’그 다음 목표가 뭐니?'하고 사람들이 너처럼 또 질문하겠지? 솔직히 지금은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그래서 좀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어.


따: 이제 미디엄 템포로 방황 중이네.


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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