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xt page is......"
"아니 다음장에 또 뭐가 있어?"
내가 이렇게 말을 하자, 옆에 앉으셨던 사장님께서 나에게 묻는다.
나는 따로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마지막 PPT 장으로 탭을 눌러 이동했다.
나를 제외한 회의실의 열명 남짓한 사람들 모두 웃음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순간 나도 이제 끝이다라는 생각에 긴장으로 건물의 난방으로 달아올랐던 볼의 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끝났다! 얼른 집에 가고 싶다!
오늘은 진짜 밤에 떡볶이 잔뜩 먹으면서 드라마 보고 늦게 자야지!'
모든 발표자들은 이 순간 다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얼마 전 내가 담당하고 있던 밴더의 상무님께서, 본사에 있는 지사장님의 Boss가 한국을 방문하는데, 이번에 대리점 미팅을 원하신다고 하셨다.
지사장님보다 Boss이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의 말 한마디에 우리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 요즘같이 분위기가 안 좋은 때에 나쁜 인상보다는 좋은 이미지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밴더에서 원하는 자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야심 차게 출시한 제품은 시장에서 썩 반응이 좋지 않았다. spec이 괜찮다 싶으면 가격이 비쌌고, 가격대가 괜찮다 싶으면 spec이 한참 부족했다. 더욱이 중국에서 대부분의 개발 제품들을 들여오는 제조사들이 많아지니, 한국에서 개발을 하는 고객사가 많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니,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었다고 해도 검토가 가능한 고객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요즘 같은 연말에는 회사 내부적인 미팅이며, 연말 마무리등을 위하여 제품 소개를 받는데 시간을 잘 할애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자료를 만들기에 부끄러운 부분이 많았고, 막상 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앞으로 이런 곳에 소개한다는 의지밖에 보여줄 것이 없었다.
다행히 일전에 만들고 제출했던 자료들이 있어서 조금 수정을 하면서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막상 PPT를 만들 때는 내세울 만한 내용이 없으니 보여주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구글이미지를 검색하고 마음에 드는 로고를 찾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고, 비슷한 톤으로 맞추어야 하니 신경 쓸게 많았다.
이전에 다른 밴더들 제출했던 자료들에서도 도움을 받아서 쓸만한 그림이나 사진들을 붙여보았다가 삭제했다가를 반복하니 시간은 빛의 속도로 지나가 버렸다.
어찌어찌 제출본을 만들어서 보고 드렸더니, 사장님께서는 아직 디자인을 하거나 진행되는 고객사가 하나도 없냐면서 실망스럽다고 하셨다. 게다가 내가 나름대로 노력을 해서 만든 PPT는 너무 성의 없다고 하시면서, 그룹장과 팀장에게 메일을 보내셨다.
사실 그룹장과 팀장은 내가 이 미팅이 엄청 중요하니 함께 준비하고 자료 만들 때 아이디어를 달라고 할 때도 남의 일처럼 이건 했냐 그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등의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것 같았다. 마치 내 일이 아니니, 네가 알아서 해!라는 그런 느낌이었지만,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자료는 팀장과 둘이 머리를 짜내서 만들었고, 완성본을 보내면서 사장님께는 현재 상황이 우리가 안 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본격적인 line up이 준비가 되고 있으며, 그동안 여러 시도가 쉽지 않았었다는 내용을 요약해서 메일로 보고 드렸다.
사실 자료 만드는 것까지는 욕을 먹어도 하면 되는 것이니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미국인인 지사장님의 Boss에게 발표해야 하니, PPT 페이지마다 스크립트를 써야 했고, 매끄러운 문장으로 수정을 해야 했고, 입에 착 붙도록 여러 번 읽고(심지어 외워야 할 지도) 준비를 해야 했다.
한국말로 발표를 해도 말이 꼬일 판에, 영어로 기술적인 내용 및 사양등을 이야기하려니 쉽지 않았다. 챗GPT의 도움을 받아서 문장을 매끄럽게 바꾸고, 또 읽다가 이상한 문장은 다시 수정해서 또 바꾸고를 여러 번 하게 되니 점점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 두는 건데!'
이미 지난 후회 같은 것은 의미 없었지만, 늘 이렇게 닥치고 나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다.
그렇게 발표 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혼자서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행히 영어에 능통하신 사장님 덕분에 첫 회사 소개와 현재의 상황들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넘어가면서 내가 준비한 자료를 발표할 시간이 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1시간이었다.
사장님께서 서두에 시장동향, 우리 회사 소개 등으로 이미 40분 넘게 말씀을 나누셨기에, 나에게는 20분의 시간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20분 안에 후다닥 해치우자!'
그렇게 나의 인사와 함께 발표가 시작되었다.
첫 장에는 내가 소개할 Application 별로 고객사 TOP 123를 정해두고, 그 고개사로의 예상 매출과 경쟁사 정보 등을 담았다. 시간이 부족하면 사실 이 한 장만으로도 이야기는 다 끝날 수도 있는 페이지였기 때문이다.
그냥 한국에 있는 이런 애플리케이션과 이 고객사에 소개하고 데모를 하려고 한다라고 말하려던 찰나,
"오! OO 여기 나 알아!"
그렇게 또 보스가 다음장을 넘어가려는 나의 말을 막고, 말을 시작했다.
"이 OO는 나도 지금 쓰고 있어!"
아니 이게 웬 말인가! 이름을 하나도 모르는 고객사보다 뭔가 아는 회사, 그리고 그 회사의 제품에 자기네 제품을 소개한다고 하니 너무나 적합하고 좋은 생각이라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 같았다.
그 후로도, 우리가 target으로 잡은 Application에 아주 만족해하는 것 같았기에 이후 발표도 순조로웠다.
이상한 것은 내가 그렇게 스크립트를 쓰고 여러 번 읽으면서도 프린트로 뽑아갔던 그 내용을 보지 않고 발표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팅 중간의 분위기를 보면서 필요 없는 내용은 그냥 잘라버리고, 좀 더 관심 있어하는 부분을 부족한 영어지만 더듬더듬 말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더 이상 떨리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다가 좀 막히는 부분은 옆에 않은 사장님이 도와줄 것을 알기에 그랬을까.
무겁지 않게 진행되고 있는 미팅 분위기 덕분에, 나도 차츰 영어로 말하는데 용기가 생긴 것 같았다. 꼭 스크립트를 보고 읽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화면을 보면서 읽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말하면서 신이 났다. 하지만, 부족한 것은 시간이었다.
담당하시는 상무님께서, 조금 빨리 넘기자는 말씀에 중간 생략! 어차피 첫 장에서 다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페이지로 나누어하는 것이었기에 넘겨도 상관없었다.
마지막 Support & Needs까지 마무리하고, 우리도 더 열심히 이 제품의 영업을 하기 위해서, 내년에 고객사 대상으로 세미나를 하겠다는 말에 만족스러운 미소로 이제 끝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The next page is......."
사장님은 이미 발표 자료를 미리 보셨기에, 다음장이 없는 것을 아는데, 내가 다음 페이지라고 하자,
"다음장에 뭐가 또 있니?" 라며 물으셨지만,
나는 숨을 한번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THANK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