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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함을 간과하지 않을 것

by 주원

아빠와 소파에 앉아 의학 드라마를 보던 어느 날이었다.

“아빠. 나는 다음 생에 흉부외과 의사가 되고 싶어.”

“왜 다음 생이야?”

“에이. 지금 내가 어떻게 의사가 돼?”

“어느 정치인 딸도 지금부터 다시 도전한다더라. 너라고 못할 거 없다.”

“음… 근데 지금 도전하면 수술할 수 있을 때 쯤엔 손 떨려서 못 하지 않을까?”


아빠는 나의 마지막 말에 그렇겠다며 껄껄 웃었다. 이렇게 다음 생에 뭔갈 하고 싶다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해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이번 생에 해보라고 부추기는 부모가 있다니. 아마도 흉부외과가 어떤 곳인지 모르시는 것이 분명하다. 주인공이 척척 수술에 성공하고 그 악랄한 수술 스케쥴에도 보송보송하고 다크서클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나도 자세히 찾아본 건 아니지만(다음 생에 할 거니까 굳이 열심히 찾을 이유가 없다) 흉부외과는 의사조차 사명감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극한 전공이고 과도한 업무 탓에 흉부외과 전문의들의 절반 이상이 번아웃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이런 직업을 택했을 때 쌍수들고 환영하는 건 흉부외과 선배 의사들뿐일 것 같지만 힘들다니까 더 해보고 싶다. 세상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좀 이상한 사람인 것 같다고? 그걸 에필로그까지 읽고 나서야 아신 건가요…?


다음 생에 하고 싶은 건 또 있다. 바로 피겨스케이팅. 수많은 승냥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는 부족하지만 김연아 선수의 연기를 좋아해서 아직까지도 경기 영상을 찾아본다. 가장 좋아하는 경기는 2013년 세계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서 선보인 <레미제라블>인데, 하도 많이 봐서 중계하는 분의 말을 중간중간 따라할 수 있을 정도다. 레미제라블은 영화로도 봤고 뮤지컬로도 봤지만, 김연아 선수의 연기도 원작 못지 않은 깊은 감동을 전해준다. 김연아 선수가 체인지 풋 콤비네이션 스핀으로 엔딩을 장식할 때, 나는 주책맞게도 눈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몇 백 번을 봐도 어쩜 이리 좋은지…


피겨스케이팅을 이번 생이 아닌 다음 생에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단도직입적으로 몸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부상 없고 튼튼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목은 일자목이고 골반은 이미 틀어졌으며 척추는 제멋대로 연결되어 있어서 균형 감각이 좋지 않다. 걸을 때마다 비틀거려서 구두도 잘 안 신는다. 한 필라테스 선생님은 나를 보고 ‘다 좋으신데 균형 감각은 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다치지 않았던 내 발목에 항상 감사하고 있다. 평지에서도 이런 데 빙판에선 오죽하겠나. 스파이럴이나 점프, 레이백 스핀 같은 기술은 둘째치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벅찰 것이 분명하다(생각해보니 인라인 스케이트도 탈 줄 모른다).


이걸 쓰면서 ‘성인 취미 피겨스케이팅'이라고 검색하니 많은 분들의 후기와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이걸 보고 나니까 또 마음이 두근거린다. 한국 성인들의 척추와 관절 상황은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나라고 특별히 못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 잠깐, 못하면 어때. 내가 이 나이에 세계 선수권 대회를 나가거나 국가대표를 할 것도 아닌데. 흉부외과 의사의 손에는 타인의 삶과 죽음이 달려있기에 함부로 도전하지 않는 것이 맞지만 피겨 스케이팅은 그럴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좋아. 다음 생으로 미루지 말아야지. 오늘은 나의 가장 늙은 날이자 젊은 날이니까,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지. 추운 건 싫으니까 지금 말고 따스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잊지 말고 아이스링크를 찾아가야 겠다.


나는 아마 앞으로도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고, 아무도 보지 않는 영상을 만들고, 선수도 되지 못할 나이에 피겨스케이트를 타고, 운동인지 깔짝대는 것인지 모를 움직임을 반복하고, 어디가서 보여주지도 못할 승마를 배우고, 전시회를 할 마음도 없으면서 필름 사진을 찍고, 전신 거울 앞에서 유행하는 춤을 연습하고, 사람을 만나 끝을 모르는 채 사랑하다 슬퍼할 것이며, 실패할 사업을 벌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무용하다고 해도 나는 이 무용함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 무용함들은 쌓이고 쌓여 언젠가 인생을 지탱할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이 헛된 꿈들은 미래의 나를 만들어 줄 것이다. 어린 시절에 꿨던 허무맹랑한 꿈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듯이.


이 글을 읽은 여러분들은 어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쩌다 그런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도. 동료가 되어 이 무용하고 아름다운 길을 계속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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