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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전문가

고작 내가 되어버린 건

by 주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성인이 되고는 연애를 열심히 했다. 대학에 들어와서 배운 것이 연애 밖에 없다고 학교는 허투루 다녔다며 술에 취한 어느 날 밤에 누군가에게 떠들기도 했고, 대학에 들어와서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묻는 신입생에게 당연히 연애를 해야지 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후배는 우스갯소리로 넘겼을 수도 있지만 그 말은 진심이다. 내가 왜 이렇게 연애 예찬론자가 되었냐면, 연애만큼 자신의 본모습(=밑바닥)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친구들과의 관계나 사회생활에서도 많은 걸 배웠지만, 나는 정말 연애를 하면서 많이 성숙해졌다. 아니, 정확히는 연애가 끝나고 나서.


어렸을 적에는 연인과 헤어지면 친구들을 불러 술을 진탕 마시거나, 이별을 못 받아들이겠으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리거나, 송곳보다도 날카로운 단어들로 속사포 랩 실력을 보이기도 했다(미리 준비한 것도 아닌데 술술 나오더라). 그러나 그런 방식은 당장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흑역사가 되거나 미안함이 되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나는 어떤 사랑을 했든 간에 이별에는 예의, 적어도 상도덕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헤어지면 남남이지 무슨 상관이냐는 매정한 마음으로 저지른 일은 언제든, 어떻게든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믿기에.


연애를 여러 번 하고 나서 얻은 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애도의 기술이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슬픔을 어떻게 잊지? 나 자신만큼이나 가까웠던 이를 잃었고, 우리의 세계가 무너져가는 것이 보이는데 어떻게 슬프지 않은 채로 살 수가 있냐는 말이야. 누군가는 떠올리지 않고 살 수 있다곤 하지만 나는 감정을 피하지 못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뜨거운 재 속에 홀로 남아 무심결에 날아오는 기억의 조각을 맞고 자주 녹다운이 된다.


이별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가만히 있는 것뿐이다. 관계는 쌍방통행이기 때문에 내쪽에서 일방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을뿐더러 불안정한 감정 속에 하는 행동들 - 늦은 시간에 SNS에 글을 올린다던가 원치 않는 연락을 하는 등의 - 은 시간이 지나고 후회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그럴 바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낫다. 그저 가만히, 다가오는 슬픔을 마주하고 자주 울 것, 그렇다고 먹고사는 일조차 내버려 두진 않을 것.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데 쉽지 않을 땐 어딘가에 쓰면서 감정을 해소하기도 한다. 부끄럽지만 나는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적어둔다. 언젠가 마음이 약해지거나 기억이 미화되었을 때 그걸 읽으면서 내 결정의 타당성을 잊지 않으려고 그런다. 또 적어두면 나중에 ‘왜 이렇게까지 슬퍼했지?’라면서 웃으며 읽을 때가 온다. 웃는다는 건 분명 많이 괜찮아졌다는 뜻이니까 회복하는 정도도 파악할 수 있다. 어떤 방법이든 간에 슬픔을 담아두지 말고 빨리 배출해야 금방 낫는다. 회피하다간 모르는 사이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슬픔에 깔려버릴 수도 있다. 슬퍼하고 우는 건 나쁜 게 아니다. 헤어졌는데 슬프지도 않으면, 그 연애는 왜 한 거야, 도대체?


나는 또 헤어지고 나면 복기를 한다(연애도 공부니까요. 그렇죠?). ‘만약 내가 이렇게 했다면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은 하지 않는다. 역사든 연애든 If로 시작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 뭐. 그보다는 내 마음을 찬찬히 살펴본다. ‘나는 화가 나면 말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갈등은 해결되지 않을 텐데, 이럴 땐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까?’ 라거나 ‘나는 상대가 이런 것을 해주었을 때 사랑받는다고 느끼는구나' 등등. 이제는 함께할 수 없는 이와의 시간을 떠올리는 건 괴롭지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는 연애를 했다는 건 더 싫다. 아무튼 나는 이런 식으로, 여러 사람을 통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성장해왔다고 생각한다. 나의 성장을 느끼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후회나 미안함이 남지 않는 이별을 경험할 때라는 게 우습지만.


한때 ‘나쁜 놈들'이라는 카테고리 속에 넣어두었던 과거의 인물들을 모두 방생했다.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낼 땐 쓰레기 같은 놈들이라는 잔혹한 평가를 내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나쁜 것이 아니라 어리고 미숙한 것이었으며, 나와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걸을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었다(이런 얘기를 지인에게 했더니 이제 다 컸다며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했다). 피시방의 재미와 데낄라와 김연수 작가와 평양냉면과 야구와 핸드드립 커피와 뮤지컬과 스페인산 와인에 눈을 뜨게 만들어준 내 과거의 인물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덕분의 나의 세계는 깊고 또 넓어졌다. 그들은 나에게서 무엇을 얻어갔을까? 그저 나쁜 시간이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다. 잘 사세요. 우린 더 잘 살기 위해 헤어짐을 택한 것이니,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잘 살기로 해요. 나도 그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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