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기간이 아니더라도 제주는 정말 비가 자주 와요. 우리 동네의 평균 강우 일수는 무려 152일이래요. 1년의 이상은 비가 온다는 거죠. 구름이 낀 날은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제주는 별 보기 좋은 곳은 아닙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또 이렇게 말하겠죠. ‘아닌데요? 저 1100 도로에서 별 엄청 많이 봤는데요?’, ‘전 새벽에 백록담 올라가서 은하수도 봤는데요?’ 네. 대단히 축하드립니다. 운이 좋으시네요. 하지만 광공해가 덜할 뿐이지 날씨만 놓고 보면 제주도는 정말 별 보기 최악의 장소예요.
겨울을 제외하곤 저녁마다 나가서 운동장을 걷거나 뛰는데, 장마철이 되면 하늘과 눈치 게임을 해요. 비가 내리지 않을 것 같다 싶으면 후다닥 밖으로 나가 운동장을 돕니다. 달리다가 힘들 때 별을 보면 힘든 게 좀 잊히는데(정말로요!), 장마철엔 회색 구름만 보여서 그런지 달리는 게 정말 지루해요. 알아요, 트랙 달리기는 원래 지루하죠. 그런데 더 지루하다니까요. 이 두꺼운 구름 뒤엔 여름 별자리들이 반짝이고 있을 텐데! 그러니 우리는 장마가 오기 전에 빛나는 것들을 많이 봐둬야 합니다. 이번엔 별이 아니에요.
초여름이 되면 한경면 청수리나 산양리에선 반딧불이 축제가 열립니다.. 조용했던 마을이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수상한 공터가 주차장으로 바뀌죠. 저도 반딧불이 축제에 두 번 가봤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캄캄한 숲을 걷는데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나무와 돌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처음 간 축제에선 생각보다 많은 반딧불이를 만났습니다. 길 양 옆에서 연둣빛이 깜빡거리자 모두들 숨을 죽이고 걷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다 하늘에서 은하수로 추정되는 뿌연 구름 같은 걸 보기도 했고요. 별과 반딧불이라니, 아름다운 밤이었죠.
하지만 두 번째 축제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반딧불이보다 숲길을 걷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아요. 가끔씩 반딧불이 몇 마리가 제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데 만족해야 했죠. 반딧불이는 장마가 오면 볼 수 없다던데, 장마 전 마지막 행사였기 때문일까요? 제주의 밤이 너무 더웠기 때문은 아닐까요? 반딧불이는 손에 닿아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릴 만큼 연약한 생명체라고 하니까요.
축제에 다녀오고 나서 며칠 뒤, 저녁에 운동장을 뛰는데 연두색 불빛이 깜빡이며 저를 스쳐 지나갑니다. 가까운 곳에도 반딧불이가 있었네요. 별 볼 수 없는 갑갑한 밤에 반딧불이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에요. 이 작은 빛에서 긴 장마도 언젠간 끝이 찾아올 거라는 위안을 받습니다.
내년 여름엔 좀 더 일찍 반딧불이 축제에 가봐야겠어요. 올해보다 더 많은 반딧불이가 빛나고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