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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낮. 환멸의 단호박 파티

by 주원 Mar 19. 2025

제주 서쪽을 지나가다가 비닐 터널이 쳐진 밭을 보신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초당 옥수수 아니면 미니 단호박이에요. 미니 단호박은 모종을 키웠다가 3월 중순에서 말이 되면 밭에 아주 심기(정식)를 합니다. 바닥에 물을 줄 수 있는 호스를 깔고, 비닐을 덮고, 모종을 심은 뒤 그 위로 비닐 터널까지 씌우지요. 단호박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요. 어릴 땐 물만 주면 되지만, 호박 줄기와 잎이 터널 안을 채울 정도가 되면 얘기가 달라져요. 우선 터널에 씌워진 비닐을 칼로 살짝 찢어 숨통을 틔워주어야 합니다. 너무 더워도 안 되고, 추워도 안 돼서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숨구멍을 만들어야 해요. 1-2주 뒤에는 더 큰 구멍을 만들어줍니다. 팔과 손목이 아파서 비닐을 다 찢어버리고 싶지만 참아야 합니다. 그러다 호박꽃이 하나 둘 피면 비닐을 모두 걷어내요. 비닐은 또 어찌나 길고 무거운지(이게 다 네 업보이니라…). 터널의 뼈대인 지지대도 모두 땅에서 뽑아야 합니다. 뽑다가 튕기는 바람에 입술을 맞거나 손가락에 멍이 들기도 했어요. 자, 그럼 끝일까요? 노우! 짝을 맺어야죠. 수꽃의 꽃가루가 암꽃으로 날아가야 암꽃 아래에서 호박이 맺힌답니다. 요새는 벌이 줄어서 붓을 들고 직접 인공 수분을 하는 농부들도 있어요.


브런치 글 이미지 1


6월 말이 되면 슬슬 단호박을 따는 사람들로 동네가 새벽부터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올해 남들보다 조금 늦게 호박을 심어서 7월 둘째 주부터 수확하기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비가 많이 왔는데, 하필 물이 잘 빠지지 않는 밭이라 모내기 장화까지 신어야 했어요. 빨간 소쿠리와 단호박용 가위를 들고 발이 푹푹 빠지는 땅을 지나니 흙이 잔뜩 묻은 단호박들이 보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호박을 다 따면 안 돼요. 꼭지가 코르크처럼 마른 호박만 따야 해요. 그게 바로 익었다는 증거거든요. 소쿠리가 호박으로 가득 차면 소쿠리를 들고 바깥으로 나갑니다. 가뜩이나 소쿠리도 무거운데 발목까지 푹푹 빠져서 나오기가 더 힘들었어요. 트럭에 켜켜이 놓인 콘테나에 호박을 쏟아부은 뒤, 빈 소쿠리를 들고 다시 밭으로 가서 호박을 땁니다. 트럭이 밭 안으로 들어가면 훨씬 편했을 텐데, 비가 와서 이 고생을 합니다. 이웃 농부님은 밭으로 트럭을 끌고 갔다가 나오지 못해 트랙터로 끌고 나왔답니다. 단순히 비가 많이 온 걸까요? 농부들은 매년 기후 위기를 실감하고 있어요.



점심을 먹고 나면 오전에 따온 단호박을 세척합니다. 원래대로라면 물로 세척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진흙에 구른 단호박을 받고 싶어 하는 소비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올해는 이렇게 씻는 거예요. 단호박에 묻은 흙을 물로 잘 닦아내고, 상판 위에 하나하나 올려 건조합니다. 단호박은 반드시 열흘 이상 후숙해야 달아져요. 깨끗하게 씻긴 단호박을 보고 있으면 힘들었던 오전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것 같지만 땀에 젖은 옷 덕분에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렇게 단호박을 잘 쌓아둔 뒤에는 대형 선풍기를 틀어 환기를 시킵니다. 아마도 이 선풍기는 여름 내내 돌아갈 것입니다. 마지막 단호박이 창고를 떠날 때까지 말이죠.



다른 밭은 베트남에서 온 인부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어요. 덕분에 그 많은 호박을 하루 만에 다 딸 수 있었어요. 이 분들이 없다면 우리나라 농업, 아니 적어도 제주도 농업은 멈춰버릴지도 몰라요. 진짜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습니다. 우리 앞엔 수 천 개의 지저분한 호박들이 놓여있었거든요. 우리를 불쌍히 여긴 이웃사촌 영숙이 이모가 같이 호박을 세척해 주겠다며 아침 8시에 창고를 찾아왔습니다. 오전 내내 닦았는데도, 1/10도 닦지 못했습니다. 창고 앞에 앉아서 단호박을 닦다 보면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납니다. 동네 주민들도 지나가다 뭐 하냐고 한 마디씩 하고 가고요, 호박 사러 온 줄 알았더니 종교를 권유하는 사람들도 만났어요. 그러던 중 옆 동네 농부님이 볼일이 있어 창고에 찾아왔는데, 영숙이 이모가 한 마디 하시네요. "어? 완승이 삼춘! 삼춘 집에 세척기 있지 않애?" 우리는 완승이 삼춘을 잘 모르지만, 주변에서 부추긴 덕분에 우리 가족은 완승이 삼춘의 세척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살았다!



우리의 딱한 사정을 들은 영숙이 이모의 남편 덕양이 삼춘도 합세해 세척장에 도착했습니다. 처음 본 세척기는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컨베이어 벨트와 비슷한 경사로에 호박을 쏟으면, 호박이 물과 함께 브러시가 돌아가는 통로를 지나가요. 이후 작은 접시에 호박이 하나씩 올라가고, 호박 무게에 따라 선별되어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나오지요. 귤과 콜라비도 이 기계로 세척한답니다. 이런 편한 기계가 있는데 이제껏 손으로 닦고 있었다니! 분해서 눈물이 나올 뻔했지만, 닦아야 할 호박이 산더미니 화는 나중에 내기로 합니다.



단호박은 기계가 닦아주지만, 그걸 다시 콘테나에 옮기고 지게차로 들어 차에 싣는 건 사람이 해야 합니다. 손으로 직접 닦는 것보다야 훨씬 편하지만, 작업장이 비닐하우스 안에 있어서 두 시간 만에 온몸은 젖고 엄마는 더위를 먹었어요. 세척장에 있는 동안 모르는 동네 아저씨가 수박을 썰어오기도 하고, 세척장의 주인 내외분은 물과 이온 음료를 갖다 주시기도 했어요. 저는 요즘도 '이 분들이 우리의 하느님'이라 말하곤 합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삼 백개가 넘는 컨테이너에 담긴 호박을 씻을 수 있었겠어요?


브런치 글 이미지 2


어렵사리 세척해서 후숙까지 마친 호박은 농협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또 한 번 선별을 하지요. 썩은 것, 너무 큰 것, 너무 작은 것, 너무 못 생긴(?) 것을 골라내고 박스에 담아 대형 트럭에 실립니다. 여러분들이 홈쇼핑이나 마트에서 구매한 제주 단호박은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거랍니다.



영숙이 이모를 비롯한 우리 동네 농부들은 자기가 키운 농산물은 잘 먹지 않는대요. 처음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는데, 한 달 내내 호박밭에 굴러보니 왜 안 먹는지 알겠더라고요. 일 하고 오면 지쳐서 뭘 해먹기도 귀찮고, 나중엔 호박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습니다(하지만 단호박은 꾸준히 먹었습니다. 맛이 어떤지 봐야 하니까요). 그건 책임감 부족이 아니라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증거겠죠.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이곳 농부들의 7월은 온통 단호박이었습니다. 부디 맛있게 드시고, 긴 여름 건강히 보내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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