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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가 틀리지 않는 이유

직업의 이면

상사가 틀리지 않는 이유          


지인의 보도자료 서류작업을 잠시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눈에 들어온 것은 ‘에로사항’이라는 글자...갑자기 일터 현장에서 웬 ‘에로’?

물어보니 상사가 이전에 쓰던 내용을 그대로 준 거란다. ‘애로사항’이 ‘에로사항’으로 바뀌어 전달되는 현장을 목격한 셈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오류는 상사에게 전달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조용히 묻혀서 그냥 넘어갈 것이다. 마치 상사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던 것처럼...     


재미있게도 독선적인 상사일수록 오류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 이면의 구조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한국의 경우 상사의 실수나 잘못을 대놓고 부하직원이 교정하는 경우는 타이밍이 맞거나, 굉장히 가벼운 환경이거나, 혹은 반대로 매우 엄중한 상황이 아니면 별로 없다. 그런 경우가 있어도 알아서 고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넘어간다. 그러니 표면적으로는 상사의 잘못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요즘 MZ세대들은 좀 다를지 모르지만 여하튼 내가 아는 직장 내 분위기는 그랬다.


이 다양한 사람들의 시너지를 끌어낼 수 없다면 조직은 왜 필요한 것일까?


문제는 이런 것들이 원활히 소통되지 못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잘못된 관행이 답습되고, 상사는 스스로의 역량에 대해 과신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다. 부하직원은 점점 자신의 의사피력에 움츠러들게 되니 여러모로 조직은 손해를 보게 된다.     

누군가의 말처럼 회사의 분위기가 결국 오너의 성향에 따른 것이라면, 조직의 분위기는 결국 관리자인 상사의 성향에 따라간다. 편하게 틀린 것을 얘기해 주는 것, 혹은 개선사항을 피력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묘하게도 한국적 조직 상황에서는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여지가 크다. 그러면 결국 왜곡된다. 눈치를 보게 되고, 소신을 잃게 되고, 끝내 부하직원은 개선에 대한 희망을 닫게 된다. 이래서야 장기적으로 폐해는 누적되고 언젠간 큰 문제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그 피해는 결국 같이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상사의 지위에 있는 당신이 크든 작든 조직에서 별로 ‘틀리는 경우가 없다’라고
느껴진다면, 스스로의 역량에 만족할 때가 아니라 어쩌면 조직의 분위기를
돌아봐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소통되지 않는 조직은 높은 직위를 가진 개인의 반영일 뿐이다. 조직은 그러라고 모여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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