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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하 Feb 03. 2022

남은 자의 세계

풀잎들(2019)의 오프닝에 대한 소고


 두 남녀가 마주 앉은 커피숍의 풍경은 한눈에 담길 수준으로 아담하다. 발 빠른 도시의 으름장에 지쳐 여기저기 짓눌린 좁은 골목의 공간은 마침 새로운 이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 속에 자리 잡은 작은 커피숍. 마주한 두 남녀는 죽음을 이야기한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오랜 기간 이상하리만치 죽음을 멀리해왔다. 그런 지대한 사건에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살아가는 것, 살아가는 자, 살아가는 나, 살아있는 이들의 모습은 어떤 각도로 비추어봐도 흥미롭다는 점이 이를 좀 더 힘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술자리에 말도 없이 끼어 앉은 관객은 소리도 없이 줌인하는 카메라를 통해 남의 심연으로 진입한다. 그곳에는 대부분의 경우에 생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풀잎들>은 이상하다. 죽은 자의 모습은 온데간데 보이지 않지만 커피숍 인근이 어둠으로 내리깔릴 때까지 줄곧 죽음을 도처에 에워싼다. 여자는 남자 때문에 망자가 결국 죽음으로 당도했다고 나무란다.

 "나는 승희가 너무 불쌍해. 넌 불쌍하지도 않지? 너 잘 살아라. 어? 너 혼자 잘 살아!"

 "저주하는 거야? 응? 저주하는 거지?"

 언성을 높인 여자의 대사는 남자에게 저주처럼 들린 모양이다. 나는 이를 저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저주를 푸는 마법의 주문 같은 거다. 망자의 죽음이 깊게 내리찍은 낙인은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자들의 몸 이곳저곳에 박혀있을 것이다. 보기 흉하지만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보지 못하는, 지우고 싶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끔찍한 낙인. 그 낙인이 저주다. 내 몸에 들러붙은 저주를 어떻게든 지워보려는 마법의 주문 같은 말들. 나에게 주어지는 여유분의 삶, 이로 인해 두려워진 죄책감의 고통이 분노로 둔갑할 때의 희열.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식의 위안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 치는 작은 풀잎들은 오늘도 서로를 탓하며 자신의 저주를 풀어낸다.

 죽음을 경험한 자는 망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죽음이란 사건이 휩쓸고 간 주변에 남겨진 이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지 못하지만 오히려 너무 명확하게 죽음을 경험한 자들이다. 색이 사라진 홍상수의 영화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명암으로만 구축된 짓눌린 삶의 세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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