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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하 Feb 18. 2022

자신만의 것

시네도키, 뉴욕(2008), 아델이 초소형 회화를 그리는 이유


케이든(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남의 작품으로 연출한 극을 무대에 올릴 때, 아델(캐서린 키너)은 돋보기를 들여다보며 티끌만 한 그림을 그린다. 그녀가 케이든의 연극을 보고는 ‘자신만의 것’이 없다며 은근슬쩍 그를 힐책한다. 이후 홀연히 떠나버린 그녀는 케이든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자상을 남기고, 이것은 그의 온몸에, 온 삶에 독처럼 퍼져간다.


케이든의 삶에서 너무나 쉽게 퇴장해버린 아델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선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관객은 주인공인 케이든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후반을 향해 다가갈수록 우리는 그의 인생이 뉴욕, 혹은 미국, 심지어는 전 인류를 통틀어 가장 작은 제유(Synecdoche)로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중년기에 접어들어 컨디션은 좋지 않고, 아침부터 수도꼭지는 이마를 찢질 않나, 몇 번에 걸쳐 받은 병원 진료에서 의사는 그의 심각한 건강상태를 에둘러 표현한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귀여운 딸은 엄마가 데리고 어느 날 갑자기 떠나서 한 해가 다 가도록 돌아오질 않고, 텔레비전에서는 내가 나와서 화면 밖의 죽어가는 나를 조롱한다. 그는 회귀할 수 없는 인생의 기로 가운데에서 오직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내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거대 창고에 실제 크기의 도시를 건축해 자신의 인생을 응축한 연극을 만들겠다는 기획이다. 하지만 이 연극은 17년이 지나고 그가 노년에 접어들어도 개막 준비조차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케이든의 삶은 현재 진행형이고, 그를 연기하는 배우를 지도하는 배우를 지도할 배우를 기용하는 일처럼 끊임없이 연쇄적으로 불어나는 평행세계의 순환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한 남자의 거대한 세계를 결말짓는 일은 이대론 불가능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갈수록 커져만 가는 이 세계를 다시 돌려놓을 방법이 존재한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임을 인정하는 것. 자신 또한 그 수많은 엑스트라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그리고 죽는 것이다. 케이든의 죽음은 인상적이다. 이 모든 연극을 통솔하는 연출가에서 시작해 몇 초만에 지나가는 전처의 집 청소부와 배역을 바꾼 채로 결말을 맞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심지어 그의 머리를 받쳐주는 어깨의 주인공이 청소부의 어린 시절 꿈 장면에 찰나의 순간 등장하는 엄마 역 배우라는 것조차 말이다. 그들은 각자의 삶에서 반짝이는 주인공이고, 그렇게 죽음을 맞을 것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든, 인지하지 않든 인생은 흘러간다.



다시 떠올려보자. 아델은 돋보기로 봐야 겨우 보이는 초소형 회화를 그리는 창작자다. 반면 케이든은 한눈에도   들어오는 대형 창고에 건설한 도시를 무대로 삼는 창작자다. 아델이 케이든의 삶에서 손쉽게 퇴장할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보조관념을 구축하던 아델은 이미 자신만의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진작에 자신의 삶을 쟁취했다. 그러나 거대한 원관념을 만들어  속에서 헤매던 케이든은 뒤늦게 죽음의 순간 직전까지 상실과 두려움에 온몸을 바들바들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말하는 인간은 자신이 거대한 원관념의 보조관념이란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카우프만이 머릿속으로 구축하는 세계는 대체 무엇인지 그 전부를 알 길은 없으나 적어도 이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동안은 그가 터놓은 죽음의 길목을 함께 걸어간 기분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가장 지독하게 외로운 죽음을 인지한 우리는 앞으로 어떤 세계를 만들며 살아갈 것인가, 당신의 무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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