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트(2021), 치열한 예술 사이에서 실존하는 연약한 기적의 현현
이 시점의 우리는 다시 한번 반복되는 몰락의 전사를 보아내어야 할 때, 이미 답을 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보편타당하지 못한 반인륜적 범죄의 텍스트를 읽어내는 과정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적확한 태도란 무엇일까. ‘아, 저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내지는 ‘정말 나쁜 아빠로군’ 정도의 자기 성찰? 하지만 그것은 영화가 끌어들인 수많은 도구적 활자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영화가 늘 그래 왔듯 카락스의 푸념은 저마다의 율동을 반복하며 작품 이곳저곳에 산재되어 있다. 9년의 세월 끝에 찾아온 이 감격적인 영화는 감독 스스로가 집중하는 것에 집중하고, 관객들 앞에서 노래하며 동시에 그들의 아래에서 죽어간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숨을 틀어막고 단조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객석의 자리에서 즐기는 관객의 태도 정도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가 인용한 예술의 사례는 스탠딩 코미디와 오페라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예술은 영화와 달리 물성을 지니지 않는다. 순식간에 발화하고 사라지는 무대 위의 모든 행위는 어쩌면 인생의 방식과도 유사하다. 남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순식간에 파도 속으로 사라져 버린 안(마리옹 꼬띠아르)을 상기하며 괴로워하는 헨리(아담 드라이버)의 파괴적 성향과 닮아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매일 밤 무대 위로 오르는 그들은 이 행위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고 동시에 살기 위해 필요한 금전적 요건을 채워간다. 죽음이라는 전제된 사건 이전의 시간을 우리는 인생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죽어가는 모든 이들의 인생은 단지 이전에 선행된 짧은 발화에 불과하다. 카락스는, 그리고 그의 인물들은 이 점을 두려워한다.
관객이 처음 마주하는 공연은 헨리의 코미디 무대이다. 영화는 스크린 속의 관객과 스크린 밖의 관객을 서로 일치시키기 위해 시점 쇼트를 사용한다. 객석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그의 무대는 일정한 체험을 요구한다. 자살을 연상케 하는 자학적, 자기혐오적 유머는 파도처럼 휘몰아치다가 폭죽처럼 터져버린다. 헨리는 객석의 이들이 그가 죽었다고 믿게 되는 순간에 당도해서야 공연을 끝내고 무대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죽음에 대한 판타지, 이 위험한 망상은 어쩌면 그가 가진 패티쉬이고 지향점이며 동시에 두려워하는 지난한 사건일 것이다. 헨리는 죽음과 자신을 매치시키는 순간 인기를 얻는다. 죽음과 간지럼을 매치시키는 순간 비난과 아내의 죽음을 얻는다. 죽음과 살인을 매치시키는 순간 몰락의 가도를 질주한다. 어떤 방향에서 보든 그는, 카락스는, 그리고 이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유인원인 우리는 도처에 도사린 치열한 죽음 사이에서 간신히 인생을 행위하고 있다.
인류가 자신의 유전자를 이 땅에 남기는 방법은 유일하다. 자손을 만드는 것, 이를 통해 인간은 영생을 간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헨리는 아네트를 착취해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의 욕심은 단순히 부의 축적을 목표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안의 재능을, 명성을 쟁취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착취당하는 아네트의 외형을 퍼펫으로 묘사한다. 감독은 훌륭하게 노래하는 신생아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유의 전부가 아니다. 카락스는 감독이기 이전에 한 딸의 아버지이다.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여배우이자 연인이었던 예카테리나 골루베바의 딸은 그에게 어떤 존재일지 감히 가늠할 수 없다. <홀리 모터스>가 연인의 죽음을 괴로워했다면 <아네트>는 남겨진 딸과 자신의 모습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현실과 영화 속의 내러티브를 분리하는 과정에서 선택한 아네트를 묘사하는 그만의 방식은 보다 창의적이고 안전하다.
동시에 퍼펫 인형에 불과한 아네트는 촬영을 위해 타자로부터 움직임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홀리 모터스>의 후신인 이 영화는 계속해서 움직임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과 부귀와 명성을 연장하기 위해 폭주하는 헨리의 만행은 베이비 아네트를 조종당해야지만 움직일 수 있는 물건 따위로 전락시킨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구경거리가 되고, 때로는 날아올라야 하는 이 작은 기적은 단지 인형에 불과하다. 움직여야 비로소 신성해질 수 있는 카락스의 이상적 관념은 적어도 절연 선언 이전의 아네트를 움직이지 않는 무생물로 분리시킨다. 죽음의 두려움을 투영한 연장된 삶의 존재인 아네트는 움직임을 잃은 채 밑바닥을 뒹군다.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위해 딸을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아빠는 결코 신성할 수 없다.
마치 손드하임의 뮤지컬처럼 서막과 장막을 앞뒤로 병치시키는 형식의 이 영화는 스크린을 탈피하고자 한다. 관객의 숨을 틀어막고 무대 아래의 객석에 앉히는가 하면 면회 후 타락한 헨리의 몰골을 내려다보는 장면에서는 그로부터 쳐다보지 말라는 요구까지 받게 한다. <아네트>는 가장 두드러지게 형식적인 장르를 차용한다. 동시에 제4의 벽을 허무는 시도들을 통해 스크린의 장막을 무너뜨리고 영화를 하나의 체험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관객에게 묻는다. 자, 시작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