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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하 Jul 30. 2019

스스로 존재하기 위하여

마스터(2012), 65mm로 담아낸 혼란.


 영화는 차갑고 거친, 동시에 너무나도 아름답고 푸른 색상의 포말을 비추며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갈 곳을 잃은 해병 프레디(호아킨 피닉스)는 어울리지 않은 자리에서, 어울리지 않는 호객을 하며 사진기사로 활동한다. 그것도 아주 짧게. 그는 인간이 섭취하지 말아야 할 다채로운 액체들로 기가 막힌 음료를 만들어내는 재능을 선보인다. 순식간에 사진을 때려치운 그는 어느 날 밤, 만취 상태로 랭커스터(필립 시모어 호프만)의 유람선에 올라탄다. 랭커스터는 마침 신흥 종교 '코즈'를 일으켜 세우던 참이었고, 프레디 또한 다시 본인을 바른 자세로 일으켜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사이에 프레디의 위험한 액체를 끼고, 이마를 맞댄다. 그리고는 프레디의 깊은 비밀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출처: 다음 영화




 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편의상 PTA라 칭하겠다.)은 사실 이 비슷한 구도와 이야기들을 몇 번 선보이곤 했다. 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집 밖에 나앉은 존(존 C. 라일리)에게 선뜻 커피와 담배를 건네는 시드니(필립 베이커 홀) (<리노의 도박사>(1996)). 포르노 업계의 대부인 잭(버트 레이놀즈)의 영화에 찾아온 젊고  훌륭한(?) 에디(마크 월버그) (<부기 나이트>(1997)). 런던의 왕실, 사교계에 저명한 디자이너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뮤즈로 찾아온 여인 알마(빅키 크리엡스) (<팬텀 스레드>(2017)). 이처럼 한 모임, 그룹 등에 얽히게 되는 아웃사이더, 그리고 그곳의 지도자 또는 권력자와 갖게 되는 밀접한 관계 속 이야기는 이미, 혹은 앞으로도 PTA의 흥미로운 관계 구도일 것이다(<리노의 도박사>의 경우 상황이 좀 다르지만 아래에 서술할 바와 같이 두 사람의 관계 자체에 대해서는 비슷하게 그려지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일까. 통상적으로 평단은 그의 최고작을 선택할 때 대략 두 작품을 언급한다(혹은 셋). <매그놀리아>(1999)와 <마스터> (혹은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나는 후자의 손을 들어준다. 초기의 PTA는 점진적으로 더욱 흥미로운 플롯들을 줄지어 나아가게 하며,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를 선보였다. 또한 시각과 더불어 청각적인 흥미도 놓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로 온 그는 더욱 서늘해지고, 유분이 메마르는 '비상업적' 영화들을 선보인다(이것이 맞는 표현인지 확신이 서지는 않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들이라고 칭하기 또한 어렵다.). 물론 이 영화들은 모두 상업영화이다. 그러나 모든 이가 만족인 상태로 극장을 나오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 비교적 따라가기 쉬웠던 전작들과는 달리 더욱 모호해지고, 난해 해지며 뿌옇고 흐려진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수많은 이들의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개인적으로 난 이 모든 요소들이 만족스럽다. 영화를 계속 생각나게 한다는 것은 집요한, 마치 빨판을 관객의 몸 이곳저곳에 부착하여 끈질긴 사투를 벌이는, 지독한 영화적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그 절댓값인 상태로 어느 작품에나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다른 의미에서도 유효하긴 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긍정의 의미로.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




관계론적으로 명시한 의존의 방념


 프레디에게 랭커스터는 마스터다. 그런 랭커스터에게 프레디는 무엇인가. 이 둘의 관계는 마치 사제지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업자, 그 이상으로의 개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또한 목도했다. 코즈라는 공동체 속 이 둘은 더욱 끈끈한 연대를 직조한다. 분명 또 다른 관계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이 행태를 파악하기 위해 우린 먼저 두 인물을 탐구해야 한다.


프레디


 프레디는 붕괴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철모를 쓴 그를 처음 접한 순간에도 그는 이미 상당 부분이 붕괴되었다. 정신은 타락하였고, 추악하며 반사회적이다. 마치 다시 정화될 수 없는 너무나도 더러운 물 같다. 이 탁류는 갈 곳을 잃고 바다로 흘러내려 정처 없이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본인을 구속시키던 전쟁이라는 현상에 대해 그는 의존한다. 종전 선언 이후 사회로 즉, 다시 육지로 돌아오기를 거부한다. 등허리는 굽어서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그는 시종일관 허리춤에 손을 고정하여 육신을 겨우 지탱한다. 얼굴은 온갖 신경질로 마구 구겨진다.

 영화의 중반 도리스라는 여인을 회상하며 그녀를 두고 먼 길을 떠나오게 된 프레디는 다시 바다 저 멀리로 나아간다. 푸른 포말을 비추던 카메라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먼 끝의 지평선을 바라본다. 그곳엔 배도, 육지도 없다. 도리스라는 육지를 잃어버린 채, 또한 방향성을 잃어버린 채 그는 떠나간다. 그로부터 수년이 흘렀지만 그는 그 육지를 찾지 못했다. 작은 섬으로라도 존재하길 바라는 그곳은 이번엔 프레디에게서 멀리 떠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곳을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기억 속에, 아픔 속에 묻어둔 그녀는 그에게 결코 아무런 육지에도 안주할 수 없는 고통을 선사한다. 그러나 프레디는 또 다른 생존 방식을 찾아낸다. 인생에 있어서 부랑자로 변주한다. 이 상태로 그는 자기 자신을 닮은 온갖 독성 액체들을 한데 섞어마시며 정신이 혼미하게 취한 채로 랭커스터의 배에 올라타게 된다.


랭커스터


 마침 '코즈'를 한껏 부흥시킬 계획이었던 랭커스터는 폭력적인 프레디를 다름 아닌 기회로 주시한다. 과거를 탐구하고, 그 자리를 고쳐내 영혼을 편안하게 한다는 코즈의 작동원리는 그 아리송한 연구 속에서 프레디라는 적자를 발견한 셈이다. 이를 통해 증거를 내보이고, 더욱 큰 믿음과 주목을 쟁취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만으로도 프레디는 랭커스터에게 있어서 마치 예전부터 함께해왔던 것 마냥 필연적인 존재다. 그러나 프레디의 활용성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랭커스터에게 더 큰 작용(영감)을 만들어내고, 집단에서 행동대장으로 나설 뿐 아니라 랭커스터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유혈사태를 밀어붙일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결국 그들의 관계는 마스터와 인간의 구도에서 벗어나 더 큰 무언가를 획득하게 된다.

 우습게도 랭커스터는 본인이 탄생시킨 코즈에 대해 확고하게 인지하고 있지 못한다. 본인의 신자가 기존의 것과는 다르게 뒤바뀐 원리와 개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그는 반박할 기색도 보이지 않고 곧바로 역정을 낸다. 발상 이후 그 뒤의 모든 것은 그가 만들어내지 않았다. 원관념 뒤에 보조관념이 수식되지 않고, 리더십 뒤에 자주성이 뒤따르지 않으며 상당 부분을 배우자 매리(에이미 애덤스)에게 의존한다. 아니, 그녀가 제시한 방향성을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런 그에게 찾아온 단비와도 같은 동료는 정신적으로 큰 의존을 하게 만든다. 그의 공허함을 그대로 닮아있고, 똑같이 방황하며 본인에게 의지한다.

 유사 부자관계로도 보이던 이 둘의 관계는 더 깊이 다가갈수록 서로의 허점을 채워주고, 서로의 붕괴를 디딤돌 마냥 지탱해주는 의존적 관계로 그려진다. 이런 프레디에게 랭커스터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이름 아래 그를 포함시키게 된다.


 영화는 뚜렷이 명시한다. 프레디와 랭커스터의 수평적이고 의존적인, 붕괴와 디딤돌의 관계를 말이다.


출처: 다음 영화




거대한 수수께끼의 종착역


 이 영화에서 '마스터'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이 지칭은 사실 다의의 상태로 영화 이곳저곳에 위치한다. 이곳에서의 마스터는 코즈 자체이다. 또한 그 행위를 대변하는 가장 커다란 인물 랭커스터 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역류한다.

 프레디는 성적 욕망이 주체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PTA는 이 특성을 알레고리로 활용한다. 여자가 없는 군에서는 해변가에 욕망의 허구를 창조한다. 아니, 남들이 벌이는 현장의 행위를 방조한다. 그리고 끝내 그 허구 위에서 직접 음탕한 관능의 말도를 선보인다. 영화의 중반에는 환상을 창조한다. 이번엔 스스로 이루어낸다. 본인이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나체로 만들어내고야 만다. 배에서 집단으로 오디오를 돌려 들으며 일을 하고 있는 여성들 중 하나에게 다가가 종이에 몹쓸 문장을 써서 건네준다. 이런 잠재적 성범죄자의 해당사항을 두루 갖춘 그는 사실 극 중에서 여성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마지막에 가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초반, 꽤나 고상한 직업이던 사진사 프레디는 마치 그럴듯한 에로티시즘에 함몰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인 그녀와의 저녁식사에서는 금세 무성의한 졸음으로 대치한다. 랭커스터와의 대화에서 언급된 근친상간은 말 그대로 언급되기만 한다. 여성이 그의 허벅지에 슬쩍 손을 올려도 바로 뿌리친다. 프레디는 영화에서 전반적으로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랭커스터와의 관계를 벗어나 다시 방랑이 시작되어서야 끝내 여성과의 관계를 맺는다. 이는 꽤 의미심장한 결말을 가져온다.

 프레디는 관계 도중 랭커스터가 본인에게 했던 질문을 그녀에게 똑같이 반복한다. 이는 독립의 선고이다. 코즈에게, 랭커스터에게 의존적으로 점철되어있던 그는 끝내 도주한다.

 그의 불안은 육지에서 그 성질이 두드러진다. 방랑자이자 뱃사람인 프레디는 코즈라는 육지에 한동안 정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이륜차를 몰며 랭커스터의 눈 앞에서 다시 방랑이라는 본인만의 도피처로 질주한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 그는 꿈속에서(영화에서 명확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프레디가 후에 매리의 "원하는 건 있어요?"라는 질문에 둘러대며 "꿈이 있었는데..."라는 식으로 잠깐 언급한다.) 랭커스터의 전화를 받고 그에게로 찾아가 끝내 완전한 이별을 택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그가 마스터라는 존재를 거부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결국 존재에 대한 영향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는 외부적인 마스터의 존재를 삭제한다. 그리고는 새로 만들어낸다. 또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 스스로가 그 존재로 둔갑해버린다. 랭커스터의 행위를 애써 순환시키고 마스터의 의미를 호출하여 어떻게든 그 빈자리를 채워 나간다. 변증법을 실행하여 마스터에게서 도주한 것만 같았던 그는 정반합을 이루어내지 못한 채 침체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럼 거부하지 못한다면 받아들이라는 식의 사고로 본인 스스로에게 마스터를 끌어들인 그는 과연 완전한 존재로서 끝내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 그는 다시 영화의 시작으로 돌아가버린다. 불완전한 허구의 옆에 안락히 누운 그를 과연 완전한 존재로 지칭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순간 울려 퍼지는 'Changing Partners'는 불완전한 프레디 아니, 객석에 앉아있는 당신을 위해 계속 반복될 것이다. PTA가 탐구한 인간이라는 거대하고도 탁류와 같은 수수께끼는 결국 궁극적인 불완전성을 떨쳐내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출처: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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