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워홀 일기] 3. 우핑의 시작
파리를 뒤로하고 향한 곳은 Armendarits, 이름조차 생소한 프랑스 남부의 시골 마을이다. 이곳에서 15일 동안 '우퍼'로 일하며 워킹홀리데이의 서막을 열 예정이었다.
우프(WWOOF)는 농장에서 일을 거들어주고 숙식을 제공받는 프로그램이다. 처음 우핑을 알려준 사람은 I언니인데, 언니는 알프스 자락에 위치한 농장에서 소젖을 짜고 소똥을 치우고 치즈를 만들었댔다.
"진짜 힘든데, 일하다가 고개를 들면 알프스가 보여."
그가 프랑스에서 우핑을 하며 찍은 사진들은 막연한 동경을 심어주었다. 나 또한 알프스의 하이디가 되어보고 싶었다.
한편 우핑을 시작할 농가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I언니가 다녀온 농장은 인기가 많은 탓에 자리가 없었다. 경치가 좋은 알프스는 우퍼들 사이에서도 이미 유명한지 메시지를 보낸 대부분의 농장에서 자리가 모두 찼다는 답장을 받았다. 개중에는 자기소개와 사진을 꼼꼼히 요구한 후 방문을 허락한 호스트도 있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왠지 까탈스럽게 느껴져 마음이 가지 않았다. 출국일은 다가오는데 거처가 정해지지 않자 알프스를 포기하고 피레네 근처의 농장을 물색했다. 어쨌든 '산자락'이라는 풍경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출국 직전, 쟝미셸이라는 호스트로부터 흔쾌히 와도 좋다는 답장을 받았고 나는 뒤돌아볼 것도 없이 바로 가겠다고 했다. 파리에서 기차로 장장 7시간을 달려야 하는 줄은 몰랐지만, 그가 나를 받아줬다는 사실에 그저 뛸 듯이 기쁘기만 했다.
약속된 역에 내리자 멀리 젊은 여자가 보였다. 나를 마중 나온 쟝미셸의 코워커 리베였다. 그런데 그가 몰고 온 차의 상태가 심각했다. 구석진 천장에는 거미줄이 성성했고 바닥 곳곳에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마치 차 안에 하나의 생태계가 자리 잡은 듯했다. 나름 손님으로서 예의를 차려야 되나 싶어 걸친 검은색 재킷에는 금세 하얗게 먼지가 앉았다. 시골에서 세차는 무의미하고, 농장에서 나는 손님이 아니라 일꾼이라는 사실은 정확히 2시간 후 깨달을 수 있었다.
작은 차는 흙먼지를 날리며 달렸다. 리베와 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에 으레 나누는 질문들을 주고받으며 농장으로 향했다. 프랑스에 왜 왔니, 왜 우리 농장을 선택했니, 프랑스에서 무엇을 하고 싶니… 그리고 장을 보기 위해 들른 가게에서 리베는 이전의 질문들과는 사뭇 다른, 나로서는 인생에서 처음 듣는 질문을 던졌다.
"베지테리언이니? 혹시 안 먹는 고기 있니?"
이것은 우퍼들이 도착하면 꼭 묻는 질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우프 홈페이지에는 농장에서 베지테리언 식사를 제공하는지 의무적으로 표시하게 되어 있다. 채식이 어떤 유난으로 여겨지는 우리나라와 달리 이곳에서 채식은 그 자체로 존중받는 식습관이었다. 음식을 제공하는 자로서 손님에게 가리는 음식이 있는지 물어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마트에서 간략하게 장을 보고 몇 분을 더 달려 농장에 도착했다. 집 앞에선 한 여자가 책을 읽고 있었다. 미국에서 온 우퍼 마리클레르라고 했다. 그는 차를 타고 지나가는 우리를 향해 싱긋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햇빛을 받으며 오후를 즐기는 모습이 참 여유로워 보였다. 저 모습이 곧 나의 일상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설레는 마음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그래,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프랑스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 나는 에펠탑을 포기하고 양들이 뛰노는 깡시골에 짐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