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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솔 Nov 17. 2021

농장에서 자켓은 사치다

[프랑스 워홀 일기] 4. AMAP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창밖은 벌써 어둑했고 옆자리에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들렸다. 핸들을 잡은 사람은 대머리아저씨였고 조수석에는 빨갛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애가 앉아 있었다. 어쩐지 나는 둘 사이에 끼여 무릎을 바싹 붙인 채 쪼그리고 있었다. 나,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Et toi, eunsol?"


내 이름이 들리는 순간 흐릿했던 시야에 불이 들어오듯 정신이 확 들었다. 맞다. 우리는 시장에 가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틀 전 한국에서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파리에서 7시간을 달려 농장에 갓 도착한 나는 일을 하러 가고 있었다.

  



"집 한 채를 통째로 들고 왔네!"


캐리어를 2층까지 날라 준 마리클레르가 말했다. 이후의 기억은 사실 분명하지 않다. 짐을 풀고(사실 '놓고'에 가깝다) 쟝미셸과 인사를 나누고 트럭에 채소를 실었다. 그리고 나도 실렸다. 우핑의 시작이었다.


우퍼들의 거실


오늘은 AMAP이 있는 날이었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너도 갈래?라고 물어보기에 당연하지!라고 대답했다. 채소와 나를 실은 트럭이 향한 곳은 정확히는 시장은 아니었다. 30여 분을 달려 도달한 마을 광장에 농부들이 가판대를 펼쳐놓고 있었다. AMAP은 일종의 농촌 멤버십 제도로 일주일에 한 번 농부들이 주민들과 직거래를 하는 장터라는 사실은 후에 알게 되었다.


천막을 펼치고 가판대를 세우고 나무상자에 든 채소들을 부지런히 날랐다. 그 모든 일들을 하는 동안 나는 하필이면 부들부들한 자켓을, 그것도 출국 직전 사가지고 와 파리에서 딱 한 번 입은 자켓을 입고 있었다. 그래도 호스트와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가는 것은 조금 무례해 보일 것 같아 일부러 고른 옷이었다. 그런데 예의를 차리기도 전에 일하는 현장에 끌려오게 됐으니 기우도 이런 기우가 없었다. 옷은 금세 나무가시에 긁혀 보풀이 일어나고 실밥이 빠졌다. 너덜너덜해진 자켓을 보며 허탈한 마음도 들었지만, 것보다 광장에 모인 많은 사람 중 "차려입은" 사람이 나밖에 없어 민망한 마음이 더 컸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에게 관심이 없다지만, 벗자니 추워서 걸치고 있던 자켓이 왠지 젠체하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스러웠다. 농장에서 자켓은 사치였다. 여기에선 흙이 묻어도 아깝지 않고 무엇보다도 내 몸이 편한 옷을 입는 게 제일이었다. 모두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뜩이나 적응할 틈도 없이 채소를 담는 와중에 어색하게 걸친 자켓 때문에 왠지 더 쭈뼛해졌다.



역시나 사람들은 내 옷에는 관심이 없는듯했지만 내 존재에는 관심이 많았다. 처음 나타난 아시아여자애에게 자초지종을 묻는 얼굴에는 호기심과 반가움이 각각 반쯤 보였다. 파리에선 느낄 수 없었던 어떤 따뜻함이 눈에서 눈으로 전해졌다. 나는 나의 여정과 프랑스에서 살기로 한 이유와 앞으로의 계획 따위에 대해 반복적으로 설명하며 바구니에 채소를 착착 담았다. 피곤함과 민망함과 추위가 뒤섞여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가판대에 서 있었지만 그날의 하늘색만큼은 여전히 선명하다.


장이 끝난 후 농부들과 주민들 열댓 명이 피자가게에 둘러앉았다. 방금 전까지 채소를 팔고, 채소를 사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식사를 했다. 다정한 안부들을 주고받고 가끔은 언성을 높여 토론하기도 하며 오래도록 피자를 함께 먹었다. 판매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이 마을에서 그런 경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 사이에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눈치껏 웃고 눈치껏 침묵하며 피자를 입에 넣었다. 아직도 이때 먹은 피자보다 맛있는 피자를 그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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