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워홀 일기] 2. 배려와 존중
파리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 몸의 반만 한 캐리어를 바닥에 찰박이며 숙소로 향했다. 문 앞에서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시간은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어두운 파리의 뒷골목에서 나는 당연히 혼자였다. 비를 맞으며 으스스한 기분으로 서 있는데 지나가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벌써 인종차별이나 캣콜링을 당하는 것일까, 닫힌 문 앞에서 나는 잔뜩 쭈그러들었다.
낯선 남자는 내 앞에 쓰러져 있던 전동 킥보드가 내 것인지 물었다. 바짝 경계하며 아니라고 대답하자 이번엔 킥보드 옆에 나란히 놓여 있던 나의 캐리어를 가리켰다. 문득 파리에서 눈 뜨고 코 베이듯 소매치기를 당한 친구의 일화가 떠올랐다. 캐리어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걸까. 그는 혀를 한번 차고 말했다.
“여긴 사람이 다니는 길이예요, 마담.”
그제야 고개를 들고 내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니 쓰러진 킥보드와 나의 24인치 캐리어로 통행로가 막혀 있었다. 남자는 킥보드를 올려 세우고 강아지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괜스레 긴장한 게 머쓱해졌다. 낯선 땅, 낯선 골목에서 나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지나가는 이들을 배려하지 못했던 내 모습을 자책했다.
파리에서 묵을 숙소는 에어비앤비였다. 거실을 호스트가 쓰고 방 한 칸을 내가 쓰는 공유형이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위치도 좋아 예약했지만 한 가지 놓친 점이 있다. 호스트와 화장실을 같이 쓴다는 거였다.
14시간의 비행 후 드디어 들어간 숙소에서 나는 온몸의 피로를 구석구석 씻기고 있었다. 밖에서 비까지 맞고 들어온 터라 뜨거운 물이 그렇게 포근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노곤하게 샤워를 하는 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고 호스트가 화장실을 써야 하니 빨리 나와달라고 말했다. 몸을 닦을 겨를이 없어 옷걸이에 걸쳐져 있던 샤워가운을 입고 방으로 들어갔더니 호스트가 이내 방문을 두드렸다. 황급히 옷을 입고 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내 손에 들려 있던 샤워가운을 휙 낚아채며 언성을 높였다.
"IL FAUT RESPECTER !"
그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It’s mine! Don’t use this. You should respect me! 이어 들리는 말들은 영어였다. 나는 어정쩡하게 서서 따발총처럼 이어지는 꾸중을 듣고만 있었다. 샤워가운을 왜 맘대로 가져갔냐, 씻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 여기 물값이 얼만지 아냐, 머리카락은 왜 안 치우냐…
붉으락푸르락한 그의 얼굴을 보고 새파랗게 기가 질린 내 입에선 영어도 프랑스어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버버하며 그저 암쏘리, 암리얼리쏘리만 반복했다. 샤워가운은 모르고 썼다손 치더라도, 샤워를 오래 하고 머리카락도 제대로 치우지 않은 건 변명의 여지없이 나의 잘못이었다. 여독을 풀기 바빠 집을 내어준 호스트의 불편함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나이가 지긋한 호스트의 꾸중을 듣고 있으니 인생의 한 장면이 데자뷰처럼 떠올랐다. 날짜는 2016년 8월, 장소는 프랑스 앙제의 아파트. 그때도 나는 샤워를 마치고 주인할머니에게 혼나고 있었다. 이유는 같았다. 그 후로 샤워를 할 때마다 조르르 흘러나오는 물로 비눗기가 채 가시지 않은 미끌미끌한 몸을 후다닥 닦고 나왔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 나는 습관을 바꾸지 못했고 지금 여기, 파리에서 똑같은 이유로 또 혼나고 있었다.
IL FAUT RESPECTER. 호스트는 나에게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생략된 목적어에는 그녀의 삶이, 그녀의 이웃이, 그녀의 욕실이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나의 삶을, 나의 이웃을, 나의 욕실을 존중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력이 좋은 래퍼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외치는 리스펙! 이전에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각자의 자유를 보장받는 respect이 프랑스엔 있었고 나에겐 부족했다. 어쩌면 이번 워홀에서 가장 먼저 배운 것, 그리고 앞으로 배우게 될 것이 바로 그 리스펙, 배려일지도 몰랐다. 새삼 그동안 얼마나 제멋대로 살아왔는지 고찰하게 되었다. 이토록 이기적인 내가 워킹홀리데이를 무사히 시작할 수 있을까? 파리에 입성했다는 뿌듯함도 잠시, 자괴감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눈물을 닦으며 첫날부터 상당히 걱정스러워진 채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