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워홀 일기] 5. 노동은 쓰고 채소는 달다
AMAP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내일은 몇 시에 일과를 시작하는지 물었다. 쟝미셸은 아침 8시까지 나오면 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닌데 그때는 8시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농장일을 그렇게 일찍 시작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빨라야 9시, 대충 10시 정도에 느지막이 일어나 슬금슬금 밭으로 나갈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여기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일하러' 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야 했다. 이곳은 에어비앤비가 아니라 우핑이었고 나는 여행자가 아니라 일꾼이었다. 하지만 채 풀리지 않은 여독을 말끔히 씻어 내줄 단잠이 간절한 것도 사실이었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쟝미셸은 먼 거리를 여행했으니 피곤하면 조금 늦게 나와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순진한 미소를 띤 채 덧붙였다.
"대신 마리클레르가 그만큼 일을 더 하면 되지."
그 말을 듣고 옆에 있던 마리클레르는 자기는 괜찮으니 푹 쉬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은 진심 같았다. 하지만 어쨌든 내일부터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던 나의 일을 누군가에게 떠넘기고 싶지 않았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나는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마리클레르에 대한 모종의 책임감 때문인지 7시에 눈을 딱 떴다. 깊은 잠이 곳곳을 치유해준 듯 몸도 가뿐했다. 새벽의 이슬이 총총히 맺힌 상쾌한 아침이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이때까지만 해도 노동을 한다기보다 특별한 경험을 한다는 생각에 마냥 들떠 있었다. 학창 시절 '농활' 한번 못 가본 것이 은근한 한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농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씨앗을 심으면 식물이 자란다' 정도였다. 아무것도 몰랐다는 말이다. 아빠가 만든 작은 주말농장에서 상추나 고추를 몇 번 따 본 적은 있어도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거들어본 적은 없었다.
나는 하얀색 운동화를 신고 룰루랄라 나갔다. 그리고 밭에 한 번 들어갔다가 후다닥 나왔다. 밭의 흙은 해변의 고운 모래알이 아니었다. 놀이터의 부슬부슬한 흙과도 달랐다. 아주 질고 퍽퍽했다. 아, 나는 왜 워홀을 오기 직전에 쇼핑을 했을까. 자켓과 마찬가지로 처음 사서 고이 들고 온 신발이었다. 진흙 범벅이 된 운동화를 보고 리베가 장화를 빌려주고 붉은색 목장갑도 쥐여주었다. 그제야 온전한 장비를 갖춘 느낌으로 편하게 밭에 입성할 수 있었다.
오늘의 첫 번째 임무는 비닐하우스에 새싹을 심는 것이었다. 끝이 둥근 원뿔 모양의 도구로 밭두둑의 흙을 조금 파내고 판에 담긴 모종을 옮겨 심으면 끝! 너무 재밌었다! 딱 1분 동안만. 흙을 톡톡 두드리며 오랜만에 흙놀이하는 기분도 들었지만 재미의 유효기간은 1분이었다. 앉은뱅이 자세로 계속 게처럼 움직이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빨리 끝내고 쉬자는 생각으로 기계처럼 같은 손놀림을 반복했다. 하지만 비닐하우스는 작은 듯 넓었다. 한 고랑을 끝내면 다음 고랑이, 다음 고랑을 끝내면 그다음 고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쉬지 않고 모종을 심는 중에 농장 직원 알렉스가 들어왔다. 인사를 하려고 일어난 순간 머리가 핑 돌고 눈앞이 새하얘졌다. 한참 동안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리를 부여잡고 중심을 잡기 위해 애썼다. 시야는 서서히 회복됐지만 이러다 쓰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클레르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깐 밖에 나가 바람을 쐤다. 시계를 보니 일을 시작한 지 30분밖에 안 지나 있었다.
모종 심기는 그나마 약과였다. 온몸의 힘을 쥐어짜내야 하는 일은 토마토 줄기 뽑기다. 나는 왜 토마토가 같은 줄기에서 계속 열린다고 생각했을까. 영생의 샘도 아니고. 한 해 농사가 끝나고 주렁주렁 열린 토마토를 다 따고 나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죽은 줄기들을 뿌리째 뽑아내야 새로운 씨앗을 심을 수 있었다. 죽은 걸 솎아내야 새로운 자리가 마련된다는 이 당연한 진리를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토마토가 나에게 오는 과정을 생각할 일은 사실 별로 없었으니까.
웬만한 토마토 줄기는 나보다 키가 컸다. 애인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다시피 토마토 줄기를 잡고 당겼다. 가끔 뿌리가 깊이 박혀 있으면 줄기가 아니라 내가 나가떨어지기도 했다. 흙에 처박히기를 몇 번 반복하니 요령도 생기긴 개뿔, 요령 같은 건 없었다. 중요한 건 그냥 힘이었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는 심정으로 나중에는 줄기를 마구 잡아당겼다. 마지막 줄기를 뽑아 던져버리고 돌아본 밭은 쑥대밭이었고 내 머리는 쑥대머리였다.
일은 정오를 넘겨 오후 1시쯤 끝났다. 점심은 마리클레르가 준비해주었다. 그가 만든 음식은 피프라드(piperade)라는 바스크 지역 전통음식으로 쟝미셸에게 레시피를 전수받아 만들었다고 했다. 토마토와 파프리카, 고추를 넣고 끓인 수프에 달걀을 풀고 오믈렛처럼 바게트에 얹어 먹는 요리였다. 마리클레르의 요리실력은 탁월했다. 맛있는 수프가 배를 뜨끈하게 데워주니 금세 노곤해졌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뜨니 저녁 여섯 시 반이었다. 부엌에선 마리클레르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염치도 없이 일어나자마자 또 저녁 식사를 얻어먹게 되었는데 그저 프라이팬에 구웠을 뿐인 가지와 단호박이 이렇게 맛있는지 몰랐다. 단호박은 '단'호박이라는 이름에서부터 단맛을 뿜어내지만, 가지가 달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모든 채소에는 기본적으로 단맛이 있었다.
오늘 요리에 사용한 채소들은 모두 농장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여기 있는 동안 농장의 채소와 과일은 마음껏 갖다 먹어도 된다는 것이 쟝미셸의 전언이었다. 노동의 결과는 이토록 달콤했다. 아, 이 맛에 농사를 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