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의 어느 날, 양털후리스를 입고 바가지머리를 한 남자와 롱치마에 크로스백을 걸친 여자가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한국인들이었다. 한국어로 예약하셨냐고 묻자 젊은 커플은 동그란 눈으로 나에게 한국분이냐고 되물었다. 리옹은 한국인이 흔치 않은 동네다. 커플은 희귀종을 보듯 나를 바라봤다.
식당에서 한국인을 마주치면 괜히 반갑다. 오며 가며 커플을 힐끔힐끔 쳐다보다 초밥을 가져다주며 여행중이신지 물었다. 둘은 유럽여행 중이라고 했다. 예의치레일 수도 있지만 반가운 마음에 번호를 교환했고, 곧 내 카카오톡에는 동그란 성진이(가명)와 아담한 희영이(역시 가명)가 떴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 새 커플은 나가고 없었다. 제대로 배웅해주지도 못해 아쉬웠지만 잠시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퇴근 전, 매니저가 나를 불러 10유로짜리 지폐를 한 장 쥐어주었다. 한국인 커플이 놓고 간 팁이라고 했다. 1유로도 아니고 10유로라니, 유럽 물정도 모르는구나! 그 순수한 마음이 고마워서 그들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다음 날 만났다. 둘은 식당 근처 호텔에 묵고 있었다. 브레이크타임이라 갈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하자 자기들이 있는 호텔로 오라고 했다. 곧 성진이가 나와 나를 데리고 방에 들어갔다.커플이 묵는 방에 들어가기가 좀 멋쩍었지만 프랑스 과자를 몇 개 사들고 방문을 두드렸다.
방이 작아 침대 위에 셋이 마주 보고 앉아 과자를 노나먹었다. 다시 보니 둘은 정말 말갛게 어렸다. 스물 네 살 성진이, 스물 두 살 희영이.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정말 이야기만 했다. 쾌활한성진이는 어느 새나를 누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리옹에 친한 동생들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성진이와 희영이는 식당에 또 들렀다. 일하면서 손님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그들을 바라보기 못내 아쉬워서 그저 인사만 계속 했다. 잘가, 잘가, 다음에 또 봐, 잘 가.
그래서 우리는 다음 날 또 만났다. 둘은 오후에 니스로 떠난다고 했다. 아침 일찍 만나 브런치카페에서 간단한 수프와 샌드위치를 사 줬다. 고작 이틀 만났을 뿐인데 정이 들었다. 리옹에서 인연을 만들 땐 항상 내가 떠나는 입장이었는데,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입장이 되보기는 처음이었다. 한 번 더 만나도 이별이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가면 꼭 연락하라고, 셋이 꼭 다시 만나 술을 마시러 가자고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얼마 후 성진이는 인스타그램에 썼다.
"여기서 정말 따뜻한 인연을 하나 만들어서 그런지 다음에 이곳을 떠올리자면 가장 먼저 한 글자로 情이 떠오르겠다."
수다스러웠던 성진이와 부끄럼이 넘쳤던 희영이. 작은 커플과의 만남은 그저 외로움만 쌓이고 쌓였던 12월의 연말, 한 조각의 달달한 초콜렛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