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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Jan 18. 2024

겨울의 한가운데

   새해가 되고 보름이 지났다. 겨울의 한가운데를 넘어섰구나 싶다. 12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를 겨울로 친다면 1월 중순인 지금 절반을 넘어선 게 맞다. 그런 계산법이 아니어도 햇볕의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아직은 아침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까지 떨어지기도 하지만, 대기에 어리는 태양 빛에선 이미 변화가 느껴진다. 곧게 내려와 사물에 가만가만 닿았던 빛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널리 퍼져나가는 느낌. 흩어졌던 것들이 모이는 수렴의 계절인 겨울, 이제 그 정점을 지나 단단히 뭉쳐 있던 것들의 밀도가 다시 풀어지고 있다. 중간을 지났다는 건 막바지에 이른 것과 같다. 계절이든 관념이든 대부분 진행 속도가 그렇다. 산을 오르는 것도, 일생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시작은 찬찬히 느리게 나아가지만 한가운데를 지나면 이미 시선은 다음 단계를 향하게 된다.  

   

   우리나라 사계절은 계절마다 지닌 고유 특색이 있다. 그중 다른 계절과 확연히 구별되는 겨울만의 특색은 공간의 느낌이다. 고집을 내보이는 편은 아닌데 어릴 때부터 혼자 쓰는 방을 고수한 나는, 왜 그런지 평생 나만의 방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런 내게 겨울은 방문 앞에 서 있는 기분으로 시작된다. 방 안엔 책이 가득 쌓였고, 장작 난로가 타오르고, 식탁엔 뚝배기 음식과 따뜻한 차가 놓였고, 구석 탁자엔 바느질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문을 열기 전엔 언제나 주저하는 마음이 든다. 얼마나 추울 것인가. 난로 연기는 괴롭기도 할 것이고, 몸 관절은 굳어버릴 것이고, 어둠은 지나치게 일찍 찾아올 테고, 새벽은 길고 길어 막막할 것이다. 그러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알게 된다. 삶에서 늘 내가 그리워했던 것들이 이곳에 있다는 걸.

 

   겨울방에 들어서면 포근한 이불부터 꺼내 놓는다. 언제든 걸칠 수 있게 두툼한 가운도 가까이 걸어두고, 밑이 납작한 뚝배기는 난로 위에 올려 둔다. 책장 앞에서 서성대다 책도 한두 권 골라 든다. 겨울방엔 그렇게 책을 옆에 두고 바느질거리를 손에 든 채, 창밖을 무연히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세상과 부엌의 질서에 골몰하던 여인이기도 하고, 미로처럼 이어지던 골목들과 강에 걸쳐진 다리 위를 걸어가는 어린 여자이기도 하고, 텅 빈 집에 혼자 남아 있는 열 살 무렵 아이이기도 하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열 살 무렵, 우리 가족은 살고 있던 대구 집을 비워두고 남쪽 바다에서 멀지 않은 진해라는 고장에 가서 일 년 동안 지낸 적이 있다. 근무처가 타지에 있던 아버지와 거의 떨어져 살다가 그 일 년 동안은 오롯이 함께 살게 되었다. 집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사택이어서, 같은 모양 단층 주택이 일정한 간격으로 구성된 단지 내에 있었다. 익숙하던 골목을 떠나 전혀 낯선 곳에서 한정된 기간 살았던 때문인지 그때의 기억은 섬처럼 외따로 남아 있다. 아니 섬보다는 책이라고 해야 할까. 오래전 읽은 뒤 책장에 고이 꽂아둔 책. 세월이 많이 흐른 만큼 내용은 희미해졌는데, 그곳에서 떠나던 날의 기억은 책의 표지처럼 속지를 감싸고 있다. 다시 펼쳐 보지 않는다 해도 표지만으로 충분한 것이기도 하다.

  진해에서 일 년을 살고 다시 대구로 돌아가던 날,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친 뒤 텅 빈 집에 혼자 돌아오게 되었다. 엄마는 짐을 싣고 언니와 동생을 데리고 먼저 떠난 상황이었다. 아마도 나는 전학 서류를 받는 절차에 차질이 생겨 그날 퇴근하는 아버지와 합류해 가기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익숙했던 세간살이가 말짱 사라지고 가족도 모두 떠나버린 빈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이 생경해졌다. 생이라는 걸 정식으로 마주한 기분이기도 했고, 누구나 각자의 생을 사는 거라는 막연한 감상이기도 했다.

     

   그때 타자화되었던 나를 지금껏 만나고 있다. 내가 있고, 나를 보고 있는 이인칭의 내가 있. 눈이 또 시작된 어제 오후, 책장에서 골라든 책은 생의 한가운데였다. 책은 너무나 낡아 표지를 감싼 겉장은 사라졌고 속지는 누렇게 색이 변해 있었다. 마른 수건을 적셔 책을 닦았다. 생이 무엇인지 한창 궁금했던 스무 살 언저리에 제목만으로 끌려 읽었던 루이제 린저의 소설이었다. 한 번은 더 읽었을 텐데 언제 마지막으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오랜만이어도 여전히 제목에 마음이 끌렸다. 생의 한가운데라니. 강렬한 이야기라 오래되었어도 얼개는 기억났다. 열정적으로 자기 삶을 사랑한 여인 니나와 그런 니나를 사랑한 남자 슈타인의 이야기다. 니나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생의 한가운데를 살아갔다면, 슈타인은 그 모습을 지켜볼 뿐 끝내  평범한 삶의 테두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거침없이 자신의 생을 사랑한 여인도,  여인의 모든 것을 사랑한 남자도  모두 아름다웠다.

     

   「생의 한가운데」를 자에 놓아두고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내용만 떠올렸을 뿐, 책을 펼쳐 보게 되지는 않았다. 오후 두 시경 시작된 창밖의 눈은 점점 풍성해지고 있었다. 이어지는 꿈처럼 겨울은 눈이 계속되고 있다. 꿈같은 생의 한가운데를 지나왔을까. 내가 내게 물었다.

겨울방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의 한가운데도 사실 없다.  내다. 생은 늘 한가운데이자 변두리이며 사실은 그조차도 없는 것이.

            



어제, 눈 내리는 비탈길


동생과 함께 마을길


1986년에 발행된 생의 한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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