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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바다

잠이 오질 않는 어느 밤에 떠오른 시

by 이차콜


나의 지구는 드넓은 바다와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막한 바다는 나의 우울이요,

고요한 땅은 나의 자애다.


수천수만 겹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끊임없이 자애를 쳐부수고 침범한다.

그러나 나의 자애는 따스한 햇살이 되어

요동을 달래고, 흔적을 지워낸다.


이 행성에 태어나 사는 동안

바다 없인 살 순 없을 테다.

나는 동요 없이 그저 단단한 대지 위에

두 발을 딛고

바다에 삼켜지지 않도록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내 삶을, 소복이 그 위에 쌓아간다.


시리고 미운 파랑은 고요하다가도

도망칠 틈조차 없이 웅장하게 몰아친다.

그래도 내가 숨 쉴 수 있었던 건,

휩쓸려가지 않도록 나를 붙잡아주는

자애가 있기 때문이다.


파도에 깎여 부서져도,

잘게 조각나 부스러진 모레가 되어

자비 없는 푸름에 이리저리 휩쓸려 방황하더라도,

결국, 돌아갈 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번 찍어낸 동백의 붉음이

매 해 더 짙어질수록,

파랑 또한 짙어졌다.

지워지지 않는 붉음과 푸름으로

하얀 천은 물들어졌다.


앞다퉈 물들어가는 그 붉음과 푸름을

속절없이 바라보아야만 했다.

점점 사라지는 순백을

녹아내리듯 흘려보내야 했다.


그때, 타오르는 적과

얼어붙은 청으로만 가득할 것 같은 세상에

처음 보는 색이 피어올랐다.

보랏빛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해야 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붉은 보랏빛으로,

붉은 분홍빛으로 삶을 물들이는 일이란 것을.


사라지지도 얼어붙지도 않는 바다에 무너지지 않고

나의 땅이 집어삼켜지지 않도록

나의 자애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내는 일.

고요하고 묵묵히 내 삶을 땅에 담아내는 일.


그것이 내가 걸어갈 길이었다.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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