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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ka Apr 14. 2021

길을 잃었다

감각의 착각

 노란 이정표가 땅으로 쑤욱 꺼지고, 다듬어진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의 흔적이 사라졌다. 어딘가에서 타고 흘러들어오던 공기의 냄새마저 느껴지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게 높이 솟아오른 벽들이 사방에서 나를 압박하고 있다. 나는 놀라 숨을 들이켜 마시고, 그러는 사이 벽들은 바짝 밀착해왔다. 내가 뱉는 숨들이 곧바로 벽에 반사되어 돌아올 정도의 거리에서 나는 얼어붙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감각의 착각이었다.


 어떡해? 나는 마치  디딜 곳을 잃어버린 사물처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계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내디뎠던 발이 허공을 가를 때의 기분과 유사했지만, 차원이 달랐다. 이곳은 경계였다. 떨어지고 있지만, 떨어지고 있지 않다고 느껴지는 상태.  공간에 철저히  혼자인 것만 같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 실세계에서는 감히 맛볼  없는 감각이었다. 이곳설계한 건축가가 누구인지,  감각을 제공해주는 요리사가 누구인지  수는 없지만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있었다.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는 생각이 소멸되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잃어버린 것 따위는 없었다. 삶의 나침반이 멈추지 않는 룰렛처럼 돌아가고, 과거에 머물렀던 기억들이 잔에 물을 따르듯 흘러내렸다. 기억은 어둠을 수놓듯 공중에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정말로 떠다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기에선 높이와 너비의 개념을 감히 상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느 괴짜에게 사로잡혀, 평면의 영역에서 노역하고 있는 광대로 사람들에게 비춰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각본의 다음장이 펼쳐지듯, 주변이 하얀색으로 물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의 신체를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은 여전히 없었다. 이전 검은색 공간에서도 허우적거렸다는 감각만 있을 뿐, 실제로 내가 그런 행위를 했을지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만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공간과 일체가 된 것일까 아니면 알 수 없는 이 공간에서 나의 감각은 맛이 가버린 것일까. 뇌가 있다는 사실이 인지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고가 가능한 것은 나의 정신이 이성과 함께 어떻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 갑자기 나의 몸, 아니 생각을 끌어내리는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끌어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까마득한 공간감을 느낀다. 수직적인지, 수평적인지 모를 이끌림에 나의 정신은 웅크리고 있다. 그로 인해 나는 적어도, 입체적이라는 형상임을 감지한다.


 미래라는 개념이 생각나지 않는다. 모양도, 색도 없는 기억들이 눈이라고 인식되는 감각에 의해 보인다. 기억들과 관련된 감정과 냄새, 소리가 느껴진다. 기억들의 연속성에 정신이 닿을 때마다, 나의 생에 포함되어 있다는 확신이 강하게 든다. 기억을 들추자, 나의 정신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나의 존재가 탄생함과 동시에 이어지는 기억이니까, 기억을 감지할 수 있는 이상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 맞을 거야.


 그런데 과연, 내가 정말로 살아있는 것이 맞을까라는 의문이 거세게 몰려온다. 정말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조차 내릴 수 없다. 존재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없다. 이윽고 존재한다고 스스로 생각함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그럼 죽음인가? 탄생과 대조적인 죽음이라는 개념조차 감각에 와 닿지 못한다. 나는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니게 된 것일까. 만약 생명체가 아니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정신과 감각은 무엇일까?


 감각에 회의감을 불어넣자, 공간이 압축된다. 내 정신의 주변이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감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억들이 무척 빠르게 회전하는 모습이 보인다. 공간을 구분해주던 기억이 이제는 공간과 융합되어가고 있다. 하나의 점이 되었다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기억도 사라진 이상,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보이지 않게 된 게 아니라, 또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 느꼈던 감각과는 다르지만, 또 같은 느낌의 것들이 보인다. 새로운 공간의 탄생, 그렇다면 나 역시 새롭게 탄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 감각은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작동하는데, 내가 믿지 못했다니. 반성한다.


 반성하고 의심한다. 감각이란 무엇인가. 감각의 기만에 올라탄 나는 어느 공간에 위치해있는가. 길을 잃었고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종에게 내재된 버팀목인 감각은 나를 어느 공간으로 인도한다. 무를 창조하고 유를 붕괴시킨다. 선악의 가치판단은 없다. 세상도 없고, 나도 없으며 감각도 없다. 감지할 수 있는 것이라 믿은 것뿐이었다. 그러니 방향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단지, 인간의 합의에 기반한 감각 상품이었으니 본성에 맞게 달면 삼켜버린다. 비록 독이 들어있을지언정 신뢰를 포기할 수는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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