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ika Oct 11. 2023

불안 시나리오

god or author

 불안하기에 존재한다는, 어느 나무의 열매처럼. 혹은 달이 너무 밝아 태워버려야겠다는 어둠의 비명처럼. 불안의 목소리를 잠식시키고자 존재는 수많은 물(음)을 쏟아낸다. 하지만 오히려 물결에 휩싸이고, 길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면, 수중에 들어온 시간의 형태가 불안의 색깔을 띠게 된다. 과거는 후회와 자책으로, 현재는 고통과 고립으로 그리고 미래는 두려움과 절망으로. 생존 가능성을 높여줄 불안의 목소리가 되려 생존의 욕구를 잡아먹게 되는 자기 포식의 순간.

 곧 불안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살아남기 위한 투쟁심만이 미약하게 빛난다. 하지만 우리에겐 빛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불안, 그들이 지배하는 시간이기에. 우리는 다가오는 거대한 존재에 압도되며 죽음과는 다른, 삶의 정지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지금을 불안의 시간이라 명명할 수 있겠지만, 그건 삶의 시계가 다시 작동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지금은 그저 모든 것들이 멈춰 있으니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살아 있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기에, 그토록 삶에서의 의미를 찾아다니는 것일까. 아마도 생의 끝에서 삶을 내려다보면 나름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 않겠나,라고 어렴풋이 추측해 본다. 한 해의 끝에서야 한 해를 되돌아보고, 산꼭대기에 올라서야 걸어왔던 길이 보이듯이 죽음에 임박해진다면 그간의 삶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가겠지.

 시간은 죽음을 향해 상영되고 있으나, 삶의 결론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매 순간 망각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필름 속 화면에 집중하고 때로는 이끌려가면서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죽기 위해 살아간다는 본질을 직시한다면, 허망함과 무의미함에 사로 잡혀 상영되고 있는 영화의 스크린을 꺼버리게 될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영화의 한 순간으로 멈출지 순간의 연속으로 재생될지는 선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선택의 순간에서는 결정해야만 한다.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인가 혹은 만들어낼 것인가. 전자는 죽음에 도달해서야만 찾을 수 있으니 삶의 영역에서는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손에 쥐려고 한다면 새어나가는 공기들이 손아귀에 고통과 괴로움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 삶에 불안이 스며드는 시점과 비슷하다. 후자는 죽음과는 별개로 다른 삶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영화를 바라보는 관람자의 입장에서 삶을 매 순간 느끼고, 생각하며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게 만든다. 좀 더 능동적으로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의 세계에 확신을 기반으로.



 필름은 정지되어 있는 삶의 순간이지만, 필름을 연결시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건 결국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정지해 있는 필름에는 불안이 스며들어 있지만 필름을 이어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 역시 불안이니 삶이 고통과 행복의 연속이라는 선 안에서 우리는 불안과 타협해야 한다. 너무 불안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불안하지도 않게 적당한 균형을 이루며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멈춰 있는 필름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하나의 감정과 하나의 생각. 하나의 행동과 하나의 추억. 하나의 과거와 하나의 관계. 필름을 살펴보던 나의 존재를 카메라를 비추어보듯 들여다본다.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영화감독이 된 것처럼 렌즈를 돌려 바라본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지만, 인생의 감독 역시 나니까 불안이 써 내려간 시나리오를 나에게 맞게 각색해 본다. 더 아름다운 죽음을 목적지로 항해하는 나의 모습을 써 내려가며, 불안의 바다를 걸어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