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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름 Feb 22. 2019

싱가폴에서 이사를 다닌다는 것

어쩜 이렇게 어렵죠

"보증금 언제 돌려주실 거에요? 이사한 지 3주가 다 되었는데요."

라고 타이핑을 하면서 인상이 절로 팍, 쓰였다.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낸 내 돈이고, 보증금은 정말 '보증'의 의미가 아닌가. 계약이 종료되었고 합법적으로 보증금이 내 계좌에 들어와야 하는 날은 이미 지나고도 남았다. 그런데 내가 돈을 빌리는 사람처럼 이렇게 구차하게 메시지를 보낸 게 몇 번째인지.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설날이라 너무 바빠서요. 정말 너무너무 바쁘네요."

이 대답을 보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 설날? 무슨 개소리야. 설날 끝난지가 언젠데. 내가 이사를 나간건 심지어 1월 말이었다. 설날은 2월 중순이고. 


처음에는 다 좋아보였다. 남자친구가 오면, 직업을 구하고, 계약서에 합의한 대로 몇 개월 정도를 콘도에서 지내고, 다른 더 좋은 곳에서 지내고, 순리대로 결혼을 하고 등등. 그러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 혼자 덩그러니 싱가폴에 남게 되며 '더럽게 치사한' 돈 문제들만 둥둥 떠다니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집을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계약서를 따라 1월 까지 옴짝달짝 못할 수 밖에 없었다. 싱가포르에서 모든 것은 임대차 계약서를 따라 간다...... 법 위에 계약서가 있다. 다 필요 없고 '어떤' 계약 시 싸인을 했다면 죽이 되었든 밥이 되었든 상호 동의 하에 이루어진 거래기에 변명이나 예외가 통하지 않는다. 

 1월 말,  더 이상 100만원에 달하는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남자친구와의 지난 추억과 그간 혼자 집세를 다 부담하고 지내며 등골이 빠져왔던 기억까지 뒤로 하고 나는 작고 저렴한 곳에 입주했다. 모든 게 그래도 괜찮아보였다. 

 

 그러나 사람 좋은 집주인 할아버지 (아직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한다.) 은 내가 짐을 빼서 나가자마자 바쁘다는 말로 일관하며 한달 동안이나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이사하는 당일에 직접 모바일 뱅킹으로 이체하는 것까지 눈 앞에서 보여주고 쿨거래 종료했는데........이럴 수가 없는데.... 이럴 수가 없다.


처음에는 사실 날 많이 도와주셨던 집주인 할아버지에게 보은하는 심정으로 이것 저것 노력을 했다. 나가는 날까지. 세상에서 태어나 청소를 그렇게 열심히 해 본 적 없는데. 청소를 깨끗이 하고, 정리정돈을 완벽히 해두고. 다음 세입자를 찾을 수 있도록 한국인 커뮤니티에 사진을 찍어서 포스팅을 해주고. 각종 머그잔과 컵, 쟁반과 접시 등을 그 집에 기증하고. 보증금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너무 순진하게 알겠다고 하고 넘어갔다. 


"안녕하세요,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그런데 제 보증금은 언제 돌려주실 건가요?"

"안녕하세요. 제가 그 집에서 나간 뒤로 혹시 방문은 하셨나요? 체크는 다 해보셨어요?"

"안녕하세요? 저번 주말까지 분명히 보증금 이체해주신다고 하셨는데 오늘 확인해보니까 돈이 안 들어와있는데요. 빠른 확인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바쁘신 건 알지만 그럼 언제까지 돈 주실 수 있는지 대략적인 타임라인이라도 알려주시죠."

마지막 문자에는 읽고 답장도 하지 않던 집주인 할아버지. 나는 3주간을 그렇게 혼자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다. 왠지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문제이기도 했고, 믿으면 안 될 사람을 그렇게 멍청하게 믿은 내 자신에 대해 실망감이 커서 굳이 입 밖으로 꺼내 도움을 요청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너무 만만하게 보였나. 잘 웃고, 예의바르게 모두를 대하려고 하고, 최대한의 배려를 베푸는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쥐고 흔들 수 있는 약점으로만 비춰진 건가. 그럼 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하는 건가. 내가 잘 '못' 살고 있는 걸까?

결국 나는 싱가폴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한국인 친구에게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그녀의 전폭적인 도움와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팁을 통해 다시금 싸울 힘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용기를 갖고 바로 친한 로컬 친구/싱가폴 국적을 가진 외국 출생 친구/한국인 친구들에게 도움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착한 내 친구들. 분개하며 제 일처럼 들고 일어섰다.


"뭐야! 그런 일이 있는 데 왜 지금 말해? 기다려, 내 주변사람들한테 이 경우에 대해 물어볼게. 그리고 너도 은근 슬쩍 협박을 해봐. 이 문제를 더 크게 키우고 싶지 않으니 그 전에 보증금을 돌려줘라. 이런 식으로."

"네가 외국인에다가 어리고, 여자라서 만만하게 본 걸 수도 있어. 그런 사람들한텐 정말 본때를 보여줘야 해. 절대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넘어가지 마. 내가 받을 때까지 도와줄게."

"계약서 있어? 나한테 사진 찍어서 보내줘. 아는 변호사한테 물어보고 자문 얻으면 바로 너한테 말해줄게."

"집주인한테 내가 전화해주길 바라? 너가 원하면 내가 따져줄게."


그러나 이게 왠걸! 호기롭게 집에 돌아가 계약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이사 중 분실한 것 같았다. 옷장 밑, 침대 옆까지 찾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엉엉 울 뻔 했다. 이제 내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구나. 집주인 할아버지는 얼마든지 계약서를 꾸며내거나 해서 유리한 쪽으로 만들 수 있는데. 난 계약서도 없네. 망했다. 나같은 애는 보증금 못받아도 할 말이 없겠다. ㅅㅂ을 거의 1초에 108번씩 읊조렸다. 


그렇게 하루하루 불안에 떨던 어느 날. 그 때 집주인 할아버지의 문자가 왔다.

"우리 와이프가 계약서가 없다네. 잃어버렸나봐요. 빨리 계약서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세요."

"........? ........"

"네. 계약서 사진 드릴게요. 그런데 지금 일하고 있으니 퇴근해서 사진 찍어 보내드리죠."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인걸까? 나도 계약서를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가진 마지막 패를 다 내놓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참. 이게 무슨 일이람! 계약서를 잃어버린 집주인과 세입자라니. 코메디였다. ㅅㅂ

할 수 없이 나는 온갖 핑계를 생각해내고 머리를 굴려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했다. 실제로 말레이시아 여행이 준비되어 있었기도 했기 때문에. 하루 이틀 정도 연락을 하지 않고, 말레이시아로 떠나는 날 '싱가폴을 잠시 떠나 다음주에 돌아온다. 급한 일이 생겨서 계약서 사진을 찍어서 보내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돌아오는 날에 맞춰 보증금이 준비되었으면 좋겠다. 만약 계약서가 필요한 이유가 내 계좌번호 및 내 이름 때문이라면 여기 사진을 첨부하니 확인하고 보증금 보내 놓길 바란다.' 라고 통보를 했다. 역시 집주인 할아버지는 읽고 답장이 없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돌아오니 보증금을 전부 이체해놓았으니 확인 부탁한다, 늦어져서 너무 미안하다는 집주인의 연락이 와있었다. 드디어! 악! 그렇게 4주 간 암세포를 무럭무럭 키워가던 내 몸은 다시 활기를 되찾고 정신적 건강마저 얻어냈다. 


  서울. 하와이. KL. 알마티. 싱가포르. 

교환학생 및 해외 인턴 등으로 체류했던 곳들이다. 짧게는 한달에서 길게는 일년 넘게. 알아서 북치고 장구치고 집 구하고 이사하고 밥 해먹으며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싱가포르에서 집을 구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 난이도가 극악이다. 아니, 집을 구하는 것은 둘째치고 이 놈의 거지같은 나라는 세입자 보증금 못 떼 먹어서 안달이다. 나는 오히려 운이 좋은(?)편이고, 대부분 보증금을 떼먹히기 일쑤라고 한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서 보증금을 100% 돌려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국에서는 천인공노할 일이다.ㅋㅋ


http://www.hankookchon.com/shop_contents/kin_read.htm?kin_code=kin&idx=54139&user_search_yn=1

http://www.hankookchon.com/shop_contents/kin_read.htm?kin_code=kin&idx=54096&user_search_yn=1

http://overseas.mofa.go.kr/sg-ko/brd/m_20758/view.do?seq=25233&srchFr=&srchTo=&srchWord=&srchTp=&multi_itm_seq=0&itm_seq_1=0&itm_seq_2=0&company_cd=&company_nm=&page=15

가장 최근의 고민 글만 봐도. 한국에서는 드물게 일어나는 집주인과 세입자간의 분쟁이 꽤나 빈번하고 또한 자잘한 디테일들로 파생된 일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싱가폴은 무조건 계약서를 따라가는 나라이기에. 항상 계약서 작성 전에 꼼꼼히 읽고. 나처럼 잃어버리면 큰일난다............. 카피를 뜨는 것도 한 방법이고, 한장 한장 사진을 찍어두는 것도 좋다. 또한 입주하자마자 그 당일에 동영상 및 사진으로 집에 하자가 있는 부분을 다 담아두는 것이 나중에 보증금을 떼이지 않는데 큰 도움이 된다. 집주인이 나쁜 마음을 먹고, 원래 있던 변색된 부분이나 칠이 벗겨진 부분 등을 세입자에게 덤탱이 씌웠다는 썰은, 여기서는 굉장히 흔한 스토리다. 스몰코트라고 하여 소액 분쟁을 담당하는 재판도 따로 있는 데, 이래저래 시간과 에너지와 돈이 든다. 


다른 나라는 그래도 세입자의 손을 들어주는 경향이 있는데 싱가폴은 역시 있는 자들의 편이랄까. 

정말이지 뭐 될 뻔 했다. 인생 경험 제대로, 독하게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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