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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라우디아 Jul 24. 2022

구기동에서 11

공동인 듯 공동이 아닌 공동현관





자동차 없이 산지 만 3년이 되었다. 강북으로 이사하며 자동차를 팔았다.




별다른 문제없이 잘 굴러가던 차는 부품 교체 시기가 되자마자 하마로 바뀌더니 자잘한 고장으로 돈을 먹기 시작했다. 이사 간 곳은 북한산에 바짝 달라붙은 산동네여서 가파른 꼬불 길은 운전하기에도 주차하기에도 수월하지 않았다. 오래 고심한 끝에 차 없이는 하루도 못살던 나는 차 없이도 잘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친환경적'이라는 멋진 깃발이 나부끼는 듯했던, BMW (bus, metro, walk)와 자전거로 살아가는 길은 막상 들어서 보니 곳곳이 지뢰밭이다.




자동차가 없으면 대형마트에서 장보기는 포기해야 한다. 이케아, 코스트코, 이마트 트레이더스와 같은 대형마트들은 버스나 전철로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위치한다. 이런 대형마트들은 몇 가지 간단한 물건을 팔려고 만든 곳도 아니고 사려고 가는 곳도 아니다. 가끔 유튜브의 베이킹 레시피에서 '이 치즈는 코스트코에서 팔아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잽싸게 그 영상에서 나와 버린다. 그 레시피에 머물러 있어 봐야 해갈 안 되는 미련 때문에 내 정신건강만 나빠질 뿐이다.  




한여름철 찜통더위 속의 한줄기 위로인 수박도 포기해야 한다. 수박 몸통을 두들겨 보고 꼭지를 요리조리 살펴본 후 고심 끝에 맛있는 수박을 골랐다 해도 그 '뚠뚠한' 수박 덩어리를 안아 들고 버스로 그리고 걸어서 집까지 운반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게다가 우리 집은 계단 없는 건물의 꼭대기인 3층이다. 집에서 버스 한정거장 거리에 마트가 하나 있지만 5만 원어치 이상의 물건을 사야만 집으로 배달을 해준다. 그 마트 안을 샅샅이 둘러보아도 수박 외에 몇만 원어치씩 살만한 물건이 없었다. 온라인으로 수박을 주문해서 냉장고에서 재운 후 그냥 시원한 맛으로만 먹는다.




전철과 버스로 이동수단을 바꾼 후 나와 남편이 공통으로 괴로웠던 부분은 통화 소음이다. 전철과 버스 안에서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통화를 하는 상대방에게 약속시간에 좀 늦는다고 알려주거나 만날 장소를 재확인하는 등의 급하고, 필요하며, 간단한, 통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방이 닫혀있는, 공공장소인 버스와 전철 안에서 흔히 수다라고 부르는 신변잡기를 떠들어 대는 사람들을 순한 마음으로 보기란 나에게 무척 힘든 일이다. 뻥 뚫렸기에 두 귀로 쏟아져 들어오는 타인의 통화 소음에 나는 속수무책이다.




자동차가 없기에 자발적으로 '아싸'가 되기도 한다. 내가 살고 있는 빌라 건물 내의 열한 세 대중에서 자동차가 없다는 면에서 나는 진정한 소수자이다. 자동차가 없었던 다른 한 집이 작년 가을인가 겨울에 차를 살 예정이라고 했으니 오로지 우리 집만 자동차가 없다.




북한산 바로 아래인 이 동네에는 걸어서 갈만한 상가나 편의 시설이 거의 전무하다. 한 대 또는 두 대 심지어 세 대의 자동차가 있는 이 건물의 주민들이 전적으로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차가 없는 나는 지상층에 있는 현관을 하루에도 몇 번씩 이용하지만, 다른 주민들은 그 현관을 지나쳐서 주차장까지 내려간다. 그들에게는 주차장과 그곳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나 벽의 외관과 편의가 중요하다. 주민들이 매달 내는 관리비중 상당 부분이 자연스럽게 그곳의 보수와 미관에 사용된다.




얼마 전에는 심지어, 주민 투표를 통해 주차장에 있었던 낡은 소파를 원목으로 된 벤치로 바꾸었다. 배기가스가 늘 아른거리고 덩치 커다란 시커먼 자동차들이 주인인 공간에 왜 소파나 벤치가 필요한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입주세대수에 비해 주차공간에 여유가 있고, 우리 집에 할당된 주차구역도 비어있기에 이 공간들을 자동차가 여럿인 집에서 추가로 사용할 때 내는 비용을 주민회의에서 책정했다. 한 달에 오천 원으로 하자는 누군가의 제안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소심하게 한 달에 만원을 제안했다. 회의에 참석한 주민들이 생각하기에도 오천 원은 어이가 없는지 과반수의 찬성으로 내 주차공간은 한 달에 '만원'에 팔렸다. 요즘 만원으로 밥 한 끼는 사 먹을 수 있던가?




안에서 바깥으로 공동현관을 나갈 때는 센서가 작동하며 문이 자동으로 열린다. 얼마 전 이 자동센서를 없애고 눌러야 하는 키패드로 교체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공동현관이 주차장으로 내려갈 때 그저 스치는 곳에 불과한 절대다수의 주민들에게는 지나칠 때면 종종 센서가 작동해 자동으로 문이 열리는 것이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나에겐 매우 편리한 장치였지만.




건물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는 현관에 부착된 키패드 위의 일련번호를 눌러야 한다. 내가 이사 오기 전부터 이 키패드는 살짝 맛이 나가 있었다. 번호 하나하나의 정확한 지점을 아주 천천히, 강하게 꾹 눌러야 한다. 조금이라도 초점에서 빗나가거나 손가락의 압력이 약하면 열리지 않는다. 심지어 '천천히, 강하게 꾸우욱'을 해도 열리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장바구니를 어깨에 둘러매고 키패드를 눌러도, 또 눌러도, 심호흡 후 다시 눌러봐도 삑삑 소리만 날뿐 문이 열리지 않으면 내적 분노가 끓어오른다. 장바구니를 내려놓는다. 심기일전한 후 느리고 강하게, 말뚝을 박는다는 심정으로 키패드를 누른다. 문이 열린다. 자동으로 문이 닫히는 속도를 가늠하며 재빨리 장바구니를 둘러맨다. 무거운 물건은 내려놓을 때와 들어 올릴 때 가장 힘이 많이 드는 법이다. 집에 올라와 사 온  물건을 주방 바닥에 패대기치듯 내던질 때쯤이면 온몸과 마음이 끓어올라 넘치는 화에 압도당해 있다. 주민 전체가 공동현관을 주로 이용한다면 맛이 간 키패드 문제는 결코 이렇게 오랫동안 방치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겨울 무심코 밖으로 나가던 나는 공동현관 앞 계단에서 꽈당 자빠졌다. 공동현관 앞의 다른 곳은 멀쩡한데 왜 거기만 얼어있는지 의아한 나는 고개를 들어 건물 지붕을 보았다. 처마의 자그마한 틈 사이로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서 고드름처럼 계단 위가 꽝꽝 얼어붙은 것이다. 얼마 전엔 폭우가 퍼부은 다음날 현관 밖을 나가다 또 미끄덩 자빠졌다. 공동현관 앞의 배수구는 굴러온 나뭇잎과 흙으로 뒤덮여 있었고 온 사방이 물바다였다.




지붕의 갈라진 틈, 고장 난 듯 만듯한 상태로 계속 방치되는 현관 밖 키패드, 공동현관 앞의 배수구 등은 주민 전체가 이곳을 오고 간다면 진작에 해결되었을 문제들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 뻔질나게 이곳을 드나드는 나에겐 불편과 특히 안전의 문제이지만 어쩌다가 한 번씩 이곳을 지나치는 다른 주민들에겐 '그랬어?'정도이며 물바다에 자빠져 꽈당했다는 내 보고에 얼마나 다쳤는지 묻지도 않았다....




이사오며 이곳에서 아주아주 오랫동안, 영원히 살겠노라고 마음먹었었다. 그 대단했던 결심에 비추어 생각하면 자동차가 없어서 겪어야 하는 이 문제들 때문에 이사를 가느니 마느니 하는 건 지나친 듯 하지만 인간이란 그리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열길 우물 속은 알아도 한길밖에 안 되는 사람의 마음이란 이성이란 계산기가 내주는 수치와 비례하지 않는 법이다. 침소봉대니, '사소한' 말다툼 끝에 상대방을 칼로...' 란 뉴스가 왜 있겠는가? 비단 주머니 속에 굴러다니는 고작 콩 한알이 머릿속에서 지치지도 않고 굴러 다니며 신경을 긁어대듯이 별것 아닌 듯한 문제가 인간의 마음을 격하게 때론 사납게 만들어 큰일을 그르치거나 운명을 바꾸게도 한다.




다시 자동차를 살까 하는 생각을 지난 일 년간 수십 번도 더 했다. 당장 내일 아침에 달려 나가 자동차를 사겠노라 맘먹으며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이 되어 이성을 되찾으며 주저앉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저절로 '아싸'가 되었다. 주민회의에서 홀로 소수인 나는,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과반수가 찬성했는데 뭐, 과반수가 반대하는데 뭐'라며 쏜 비수에 맞아 아예 백기를 들어 버렸다.




핏줄이 운명을 좌지우지하던 고대와 달리 현대사회는 다수가 지배한다. 과반수 이상의 동의는, 그 결정이 정의로운가 아닌가 와는 상관없이 전체를 모양 짓는다. 이쯤이면 ‘동물의 왕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짐승의 세계에선 대체로 무리에서 뒤처진 새끼, 혹은 약하거나 다친 것들이 버려지며 포식자에게 잡아 먹힌다. 나는 다른 세대와 똑같은 관리비를 내며 다른 문제로 이 집단내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도 없다. 목소리를 크게 내지도 않고 구석에 짜부러져 있을 뿐이다.  Number talks인 이 건물에서 나는 단순히 자동차가 없어서 약자이며, 소홀히 여겨져 마땅한 존재가 되었다. 자동차 없이, 주로 걷고, 자전거를 타거나, 가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며 살아가는 삶은 나에게도 건강하고 사회와 자연의 건강에도 미약하나마 보탬이 되리라 꿈꾸었지만 현실은 이러하다. '소수자', '아싸'이기에 겪는 불편앞에서 달리 해결방법이 없기에 저절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남몰래 훔치며 기나긴 한숨 속에 화를 날려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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