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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이야기

by 소운 Mar 18. 2025

우리 옆집에는 신혼부부가 살고 있다가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면나는 하던 일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그 소리가 마치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 이시형 박사의 칼럼이 문득 떠오른다그는 아이들이 부모 은혜를 대여섯 살까지 다 갚는다고 썼다옹알이를 하고걸음마를 떼며말귀를 알아듣는 순간의 감격을 기억하는가그러면 부모는 아이들에게 이미 효도를 받은 것이라고그 시절의 기쁨은 어떤 고단함도 눈 녹듯이 사라지게 했기에더 이상 아이들로부터 효도를 기대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옆집 부부도 매일 벌어지는 효 향연을 제대로 만끽하고 있을까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내게 재잘거렸던 목소리가 지금도 서재에 화석처럼 남아있다나는 그것들을 모아 아이들 이야기라는 폴더에 정리해 두었다.     


큰아이는 아들이고그보다 세 살 어린 딸이 있다이들이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시절까지 쓴 손 편지축하 카드 그리고 아들 반성문들이 폴더 대부분을 차지한다이 시기는 IMF 환란 전후였다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황에서나는 직무 연수를 받았다수료한 뒤 우리 가정에도 격변과 혼돈이 밀물처럼 들이닥쳤다.   

       

여기 소개한 글들은 아이들이 쓴 것 중에서 주요 단락들이다아내에게 쓴 편지도 있지만이번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했다.        

   

아들의 글    

초등 6학년 : ‘97. 5월에 책 선물 합니다천천히 보세요김정현 소설 아버지

중등 1학년 아버지 힘드시죠사회 정리영어 단어장 언제 검사해도 잘하겠습니다연수 잘 다녀오세요.

중등 1학년 컴퓨터 사 주세요그것만 붙잡고 있지 않을 거고요연수 끝나는 날 별로 남지 않았네요아무 일 없도록 잘 다녀오세요.

중등 2학년 결혼 OO주년이면 짧은 세월도 아닐 텐데싫증(?) 날 때 없었겠죠(?). 술은 되도록 피하시고 담배는 하지 마세요.

중등 2학년 제 생일에는 거의 무관심이던 아버지가 본인 생일에는 약간(?) 챙기시는군요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책을 받고 저녁 늦게까지 읽으며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마지막 장을 덮고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당시 회사는 IBM5555 시리즈 전산 입력용 단말기뿐이었다나는 업무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dBASE 3』 서적을 읽고 있었다. PC 대중화가 시작될 무렵나는 PC로 ’dBASE 3‘ 프로그래밍을 해볼 생각이었는데초등생인 아들마저 PC를 사달라고 졸랐다우리 집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 아프로만의 386PC였다.

      

퇴근 후 집에 오면 아들이 보글보글’ 게임을 하고딸은 의자 등받이를 짚고 올라가 덩달아 좋아하던 기억이 생생하다이후 486DX, 586 펜티엄까지 순차적으로 업그레이드했다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PC와 친숙해지도록 도와준 것이 나에겐 큰 보람이다.  

 

아빠가 힘든 것을 모르는 아들은 술과 담배를 자제하라고 맹랑하게 나무란다그로부터 3년 뒤나는 담배를 끊었다    

 


딸의 글    

초등 2학년 제가 욕심꾸러기죠이것저것 여러 가지 물건을 많이 사려고 하니까요.

초등 3학년 이 편지가 3번째 편지예요지난 방학 때생신 카드어버이날 편지죠이제 편지가 쌓이고 쌓이게 되면 그땐 아버지 머리에 흰머리가 많고 할아버지로 변할 거예요이 편지가 아버지에게 가면 그날은 어버이날이 되고즐거운 우리 집으로 변하겠죠.

초등 4학년 선물은 좀 작지만딸의 따뜻한 마음으로 마련했어요. IMF 시대에 모두 힘을 합쳐 옛날 마냥 즐거웠던 그때로 돌아가요

초등 4학년 제가 하루에 있었던 일을 수첩에 적어드리면 거기(연수원가서 보시고 아버지도 그렇게 쓰세요.

초등 4학년 조그만 선물이랑 액자에 우리 가족사진을 넣어 거기서 보시라고 준비했어요그럼 안녕히 다녀오세요. (좀 섭섭하네)     


딸은 또박또박하면서도 귀여움이 물씬 풍기는 필체로 편지를 썼다그 시절의 따뜻한 온기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나는 재직 중에 해외 출장이나 전산화 업무로 한 달간 집을 비운 적도 있었지만그 시절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였다경기도의 연수원에서 관리자 직무교육을 받았다거의 두 달 동안 토요일 오후마다 집에 오고일요일 오후에는 다시 돌아갔다연수원으로 떠나던 첫날현관에서 가족들이 나를 배웅하는데 딸이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 품에 안겼다.   

   

마지막으로 아들의 반성문들인데아직도 거칠고 흥분된 숨결이 느껴진다대개 A4 한 장 앞뒤로 적혀있다따끔하게 혼 내키고반성문을 쓰게 한 것은 아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어길 때 때였다동생과 다투다가 싸우거나학교 또는 학원을 마친 후 친구와 놀다 늦게 귀가할 경우였다

 

오랜만에 책장을 벗어나 바람을 쐬었으니오늘 밤 잠자리 머리맡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리고 뛰놀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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