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이 뭔데? 몰라.
이동진 평론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영화를 보는 것은 메시지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만일 몇 줄의 메시지로 추리면 대부분의 영화는 같은 영화가 되어 버린다. ‘노예 12년’ ‘장고’는 분명 다른 영화지만 내용을 요약하면 ‘과거 흑인 노예의 비극적인 삶’이고, 메시지는 “차별은 안 된다”로 통일된다. 하지만 두 영화는 엄연히 별개의 작품이고, 보는 이들은 이 두 영화를 보며 다른 감정을 느낀다. 만약 메시지가 영화의 필요조건이었다면 메시지가 겹치는 수많은 영화는 존재 의미를 잃는다.
영화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을 때 나도 늘 영화에서 메시지를 찾았다. “그래서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데?”라는 질문을 일삼으며 영화를 대했다. 영화뿐만이 아니었다. 드라마나 음악, 그림에서도 ‘주장’을 파헤치려 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주변에서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이해가 안 가서 재미없었다는 감상은 너무도 쉽게 접할 수 있는 흔한 클리셰가 됐다.
그런 탓에 콘텐츠 소상공인이 되고 싶은 나는 언제나 ‘메시지’를 축으로 두었다. 메시지가 강하고 명확한 작품이 최고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글을 “결혼을 왜 굳이 해야 해!” “열심히 안 살아도 돼!” “돈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아!” 같은 분명한 주장을 내뱉으며 전개했다. 알기 쉽게 이런 메시지를 제목이나 표어로 걸고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추리고 추린 뼈만 남긴 말에 사람들은 “오오 그렇구나” 느끼고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간다는 현실을 몰랐던 것이다. 살을 음미하고, 마음대로 뜯어보고, 이것저것 탐구해 볼 여지가 없으니, 그런 콘텐츠를 보고 공감은 하겠지만 그것이 장기적 애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해리 포터 시리즈를 사랑한다. 어릴 때부터 나의 자아 형성에 엄청난 영향을 준 작품이다. 하지만 내가 해리 포터를 애정하는 이유가 ‘사랑의 중요성’이라는 메시지에서 오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메시지를 곳곳에 잘 담는 작가의 용의주도함에 빠진 면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작품 속 주인공인 해리가 성장하면 느꼈을 상실감과 외로움, 이런 결핍을 학교에서 만난 론이나 헤르미온느와 같은 인연들과 슬기롭게 이겨나가며 성장하는 모습, 마법 세계에서 벌어지는 신비로운 일들, 이러한 이 작품 속 담긴 수많은 콘텐츠가 나를 이 작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주장’이 아니었다. 그 내부의 흥미를 끄는 수많은 요소들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지식을 얻었을 때, 자신의 효용을 뽐낼 때, 새로운 경험을 했을 때, 동질감을 느낄 때 재미를 느낀다. 그래서 '슈카월드' '조승연의 탐구생활' 같은 유튜브 채널이 엄청난 인기를 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장기나 능력을 뽐내며 쾌락을 느낀다. 가 본 적 없는 곳에 간다. 에세이를 읽으며 감동받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한 이 재미 요소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자지러지게 웃기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겠지만 ‘나답게 재미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 중이다.
소수에게라도 나라는 사람이 만드는 무언가가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