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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Mar 07. 2023

12. 합숙 훈련

12. 합숙 훈련


 세찬이 사건이 있었던 후로 지후는 아침 연습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나름대로 마음의 정리를 한 건지 연습 태도도 전에 없이 진지했다. 시후보다 더한 연습벌레라던 말이 진짜였는지 동작도 다 외워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세찬이와 있었던 일을 대충 덮어놓은 터라 분위기가 썩 좋진 않았다. 연습하러 모일 때도, 끝나고 헤어질 때도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똑같이 발차기를 하고 주먹을 지르고 손날치기를 했지만, 모두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리던 날들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어느새 합숙 훈련을 하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다들 들떠 있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로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결 산뜻해졌다.

“와, 합숙 훈련이라니. 완전 설레. 우승팀은 진짜 대단하겠지? 심장 튀어나올 것 같아.”

서하가 기대감으로 달아오른 뺨을 잡고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우리 가서 창피당하는 건 아니겠지?”

름이는 걱정이 된다는 듯 수첩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초조해했다.

“연습 많이 했잖아. 박자를 좀 놓치긴 하지만, 동작 몇 개 틀리긴 하지만, 막 손발이 안 맞긴 하지만…….”

이나가 위로하는 척 름이 손등을 토닥이다가 장난을 쳤다. 은근히 약을 올리는 이나의 말에 애들이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야, 그만해. 아휴 그래, 그래. 우리 당당 멀었다. 더 열심히 하자! 아자 아자!”

진아 언니가 무릎을 팍 굽히며 기합을 넣었다. 우스꽝스러운 그 모습에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요새 계속 기운이 없어 보이던 후후 쌍둥이도 이번만큼은 시원하게 웃었다. 사실 합숙 훈련이라고 해 봤자 특별할 건 없었다. 어색한 부분들을 수정하고 지금까지 해 온 동작들을 반복해서 몇 번이고 해 보겠지. 하지만 우승팀의 태권체조를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잔뜩 부풀었다.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기대가 아이들을 달뜨게 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합숙 날이었다. 터미널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이나였다. 이나는 여섯 장의 표를 손에 들고 고모랑 같이 애들을 기다렸다. 

“체육관 차 빌려 쓰면 편하게 갈 텐데. 다들 멀미약은 먹었지? 안전벨트 단단히 매고.”

출발하기 전에 고모가 일일이 애들 상태를 확인하고 버스에 태웠다. 다들 소풍 가는 것처럼 들떠 있었다. 진아 언니는 역시나 온갖 간식으로 배낭을 꽉 채워 왔다. 름이는 제일 바깥쪽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바깥 풍경을 스케치하기 바빴다. 후후 쌍둥이는 투덕거리며 음료수를 나눠 마셨고 이나랑 서하는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잠이 들었다. 

합숙소는 이나네 지역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우승팀 코치님이 나와 이나네 일행을 맞아 주었다. 

“고생들 했네. 후배들 만난다고 우리 애들이 잔뜩 들떠 있다. 얼른 가자.”

후덕한 인상의 코치님은 끌고 온 봉고차에 이나 일행을 태워 주었다. 깡마르고 신경질적인 인상인 일등 태권도 관장님과는 척 봐도 많이 달라 보였다. 터미널에서 합숙소까지는 가까웠다. 강당으로 가니 이미 우승팀 선수들이 도복을 갖춰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잘 왔다. 시합 준비한다고? 첫 시합이라던데. 떨리겠네.”

주장이 대표로 나와 이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고작 악수를 나누는 것뿐인데 너무 떨렸다. 이나는 자기도 모르게 주장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아 위아래로 흔들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강이나라고 합니다! 여기는 저희 팀원들이에요.”

이나는 등 뒤에 서 있는 팀 애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우승팀 선수들과 이나네는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각자 몸풀기 운동에 들어갔다. 이나는 손목과 발목을 먼저 풀며 강당 주위를 둘러봤다. 주로 조회대에서 연습을 해서 몰랐는데 강당에 서 보니 공간이 너무 넓었다. 휙 둘러보기만 했는데도 어찔했다. 시합장은 강당보다 훨씬 클 텐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고 심사위원단이 앞에서 지켜볼 거라고 생각하니 이나는 갑자기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시합에 서면서 한 번도 두렵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엔 달랐다. 나 혼자 잘해 봤자 소용없다는 중압감이 이나를 짓눌렀다. 

“야, 괜찮아? 너 얼굴 안 좋은데?”

서하가 그런 이나의 상태를 알아차렸는지 가까이 다가와 소곤거렸다. 이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하지만 담담한 척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우승팀 주장이 박수 세 번을 치며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흩어져 개인 운동을 하던 팀원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자, 개인 훈련은 잠깐 접어 두고. 시범 한번 보여 주자. 오랜만에 후배들 앞에서 하려니까 우리도 떨리네. 그래도 여기까지 심심풀이로 온 건 아닐 테니까 얻어 가는 건 있어야겠지?”

 주장이 그렇게 말하고 팀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전주가 흐르는 동안 다들 자기 자리에 서서 준비 자세를 취했다. 쿵. 쿵. 북소리가 울렸다. 이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북소리와 장구 소리가 전주로 나오자 느낌이 새로웠다. 전통 음악과 태권체조의 조합이라니. 독특하면서도 상당히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게다가 우승팀이라서 그런지 서 있기만 해도 압도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각이 잡힌 자세로 다들 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끝 발끝까지 힘이 들어가 자세 자체가 탄탄했다. 

음악이 시작되자 다들 정확하게 자기 동작을 소화했다. 우리 팀보다 세 명이나 많은데 전혀 산만해 보이지 않았다. 떼를 지어 움직이는 철새들처럼 일사불란했다. 뛰어올랐다 착지하는 부분에서도 비틀거리는 사람이 없었고, 리듬이 빨라지는 데서도 먼저 앞질러 가는 사람이 없었다.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호흡을 맞춰 나갔다. 수없이 많은 연습이 만들어 낸 결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음악에 맞춰 착착 맞아떨어지는 동작은 묘한 희열감을 줬다. 군무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이었다. 누구도 튀거나 뒤처지지 않았다. 열을 맞춰 동시에 기합을 넣고 뒤후려차기로 마무리를 할 때는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영상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건 또 달랐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런 두근거림은 느끼지 못했을 것 같았다. 이나는 꽉 쥔 주먹을 가슴팍에 댔다. 처음 태권체조란 걸 알게 되었을 때처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음악이 끝나고 우승팀원들이 마무리 인사를 하자 진아 언니가 제일 먼저 손뼉을 쳤다. 그러자 다른 애들도 휙, 휘파람을 불며 손뼉을 쳤다. 대단했다.

“와, 완전 소름 돋았어요. 진짜 대박.”

이나가 거듭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금방까지 날아다니는 것처럼 움직였던 주장이 얼굴을 붉히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칭찬만 계속 받으니까 왠지 쑥스럽네. 이제 우리 후배님들 연습한 것도 보여 줘야지?”

우승팀 선배들이 뒤쪽으로 빠지고 강당 한가운데에 이나네 팀이 섰다. 이나는 옆으로 선 진아 언니와 서하에게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됐지? 하는 의미였다. 그리고 뒷줄에 선 름이 시후 지후에겐 주먹을 들어 올려 보였다. 잘해 보자는 의미였다. 곧 익숙하고 경쾌한 비트가 흘러나왔다. 아까 곡이랑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방학 내내 연습하며 들어왔던 곡인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우승팀 전부가 이나네 팀을 보고 있었다. 

이나는 어쩐지 팔다리가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그냥 서 있는 것뿐인데 종아리가 쩌릿쩌릿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어떤 평가를 받아 버린 느낌이 들었다. 저번 주 연습 때 진아 언니가 도입부에서 틀렸는데 이번엔 안 틀릴까? 서하는 아직도 다른 애들보다 좀 빨리 움직이는데 멀찍이서 보면 통일감이 떨어지지 않을까? 름이는 돌기 동작에서 너무 힘이 없는데 맥이 빠져 보이면 어떡하지? 지후 시후는 가끔 스텝이 엉키는데 넘어지진 않겠지? 온갖 걱정들이 이나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한번 의식을 하자 자꾸 손바닥에 땀이 고이고 뒷머리가 땅겼다. 어떤 결승전에서도 긴장해 본 적 없던 이나였는데 지금은 부담감에 허리를 곧게 펴기도 힘들었다. 

‘내가 이 팀을 모았는데, 내가 같이하자고 했는데.’

전주가 거의 끝나 가는데 이나는 집중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진아 언니가 갑자기 팔을 번쩍 들었다. 음악이 뚝 끊겼다. 

“앗, 잠깐만요! 저희 자리 좀 바꾸고 다시 할게요. 죄송합니다!”

진아 언니는 쩌렁쩌렁 우렁찬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음악이 중단되고 분위기가 흐트러지자 머리끝까지 신경이 곤두서 있던 이나는 맥이 탁 풀렸다. 

“강이나, 너 름이랑 자리 바꿔.”

진아 언니는 느닷없이 이나의 팔을 잡아끌고 바로 뒤에 서 있는 름이와 자리를 바꾸게 했다. 엉겁결에 앞줄에 서게 된 름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 저 앞줄은 좀…….”

“그래? 그럼 지후 네가 이나랑 자리 좀 바꿔라.”

진아 언니는 나무 조각 맞추기를 하듯 이나를 여기 세웠다 저기 세웠다 했다. 난데없이 이뤄진 자리 재배치에 모두가 얼떨떨해했다. 어차피 다 똑같은 동작들을 하는 거라 자리가 바뀌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러웠다. 진아 언니는 뒷자리에 서게 된 이나의 얼빠진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주먹으로 툭, 세지 않게 어깨를 쳤다. 

“힘 좀 빼.”

“아…….”

그제야 이나는 진아 언니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있었다. 

“좀 망치면 어떠냐? 완벽하게 못 하면 어때. 다시 하면 돼.”

별것 없는 무심한 말이었지만 그 말이 너무 위안이 됐다. 이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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