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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Mar 08. 2023

13. 따로, 그러나 함께

13. 따로그러나 함께 


“죄송한데 음악 처음부터 다시 틀어 주실 수 있을까요?” 

한결 편해진 얼굴로 이나가 부탁했다. 드럼 소리와 쨍한 전자음이 요란하게 섞인 전주가 다시 흘러나왔다. 항상 앞줄에서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동작을 하느라 몰랐는데 뒷줄에 서니 팀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앞줄에 선 애들을 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같이하고 있구나, 하는 게 실감이 났다. 몸이 가벼웠다. 삐끗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자 여유가 생겼다. 

쿵, 쿵, 쿵. 아까랑은 다르게, 가볍게 심장이 뛰었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었다. 시합 때 호구의 득점 부위를 정확하게 타격하면 등을 타고 머리끝까지 짜릿함이 쫙 올라왔다. 그때 느꼈던 기분이 바로 지금 똑같이 느껴졌다. 제쳐 지르고 비틀어 막고, 뛰어 높이 차고, 다시 양손날막기를 하고. 빨라지는 음악에 맞춰 수없이 연습했던 동작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아무도 보지 않는 조회대 위에서 우리끼리 다시, 다시, 다시, 똑같은 동작들을 하염없이 반복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자주 흐트러지는 손끝을 맞추기 위해, 자꾸 어긋나는 발끝을 맞추기 위해 얼마나 많이 서로를 살폈는지 기억이 났다. 그냥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1초, 2초, 3초. 짧은 시간이 지나는 순간에도 이나는 찍어차기를 하고 엇걸어막기를 하고 돌려지르기를 했다. 다들 마찬가지였다. 

숨이 턱까지 찬다 싶을 때, 퉁―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음악이 끝났다. 옆에서도 앞에서도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렸다. 빙 둘러 모여 이나네 팀 공연을 본 선배들이 손뼉을 쳐 주고 있었다. 순간 앞줄에 서 있던 서하가 이나를 돌아봤다. 둘의 눈이 딱 부딪혔다. 둘 다 눈빛이 일렁였다. 지금, 이 순간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첫 공연. 박수 소리. 빠르게 뛰던 심장. 자꾸 고이는 땀을 도복에 몇 번이나 문질렀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인원을 모으려고 태권도장에서 애들을 모아 놓고 둘이서만 공연하던 그날이 떠올랐다. 가슴이 뭉근하게 벅차올랐다. 둘이서 무턱대고 인원을 모은다고 종종거리고 다니던 날들이 떠올랐다. 이제는 어엿한 팀이 된 여섯 명이 함께 박수를 받고 있었다. 그게 참 좋았다. 그동안 고생했던 것들이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제법 괜찮게 짰네. 근데 그 중간에 회축 동작 부분 있지? 거기가 좀 헐렁해 보이는데.”

음악이 끝나자 우승팀 주장이 옆으로 다가와 이것저것 일러 주기 시작했다. 

“잘 봐. 이게 하우스턴이라는 기술인데, 45도 회축이랑 비슷해. 대신 머리랑 상체를 고정시키는 게 아니라 아래쪽으로 향하게 하는 거야. 화려해 보이게.”

주장이 새로운 기술을 알려 주며 시범을 보여 줬다. 확실히 그냥 회축 동작을 하는 것보다 시선을 잡아끌었다. 

“호흡, 자세, 몸의 각, 손끝 발끝. 흐트러지지 않게 집중해서 동작을 이어 나가는 것이 중요해. 너희는 각자 움직이지만,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전체가 다 한눈에 보이니까. 한 명이라도 대충 하면 바로 균형이 무너지는 거야.”

주장이 모두의 어깨를 한 번씩 토닥여 주며 말했다. 그때 지후가 눈에 띄게 침울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한 사람이라도 실수하면 끝장이네요.”

아까 높이차기를 하면서 휘청 중심을 잃었던 게 못내 걸렸던 모양이었다. 시무룩해진 후배가 귀여웠는지 주장이 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한 사람이 실수해서 끝장나는 거면 그 팀은 이미 망한 거지.”

“네?”

뜻밖의 대꾸에 지후를 비롯한 다른 애들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 명이라도 대충 하면 바로 균형이 무너진다고 하지 않았나? 균형이 무너진 팀이 보기 좋을 리가 없었다. 주장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실수랑 대충 하는 건 달라. 그건 그냥 보면 알 수 있는 거야. 연습량 부족으로 엉망인 거랑 한 번 삐끗한 건 차이가 크니까.”

“…….”

“한 사람 한 사람 다 빈틈없이 완벽하게 해내면 더할 나위 없겠지. 하지만 좋은 팀이란 건 한 사람이 실수를 해도 그걸 그냥 넘길 수 있을 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팀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확신이 담긴 주장의 말에 아이들은 순간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캄캄한 데서 갑자기 밝은 데로 나온 것처럼 얼떨떨하면서도 새로웠다.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그러나 함께. 


*


“우와, 이런 건 또 언제 다 준비하셨어요?”

“사범님 최고!”

늦게까지 계속된 훈련이 끝나고 늦은 저녁 시간 때가 되었다. 이나네 고모는 삼겹살을 잔뜩 구워 놓고 애들을 불러 모았다. 김치에 밥에 음료수에. 거하게 차려진 상차림에 아이들의 얼굴이 활짝 폈다. 

“취사가 가능하대서 먹을 것 좀 사 왔지. 수고했다, 욘석들.”

고모는 장하다는 듯 땀에 젖은 애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애들은 “으악, 아파요!” 하며 그 손길을 이리저리 피했다. 평소보다 훨씬 더 오래 연습을 했던 터라 다들 온몸의 근육들이 욱신거리는 모양이었다. 

“자기 전에 따뜻한 물로 씻고 가볍게 스트레칭도 한 번 더 해. 너무 힘들면 파스 줄 테니까 붙이고.”

자잘한 잔소리들을 늘어놓으며 고모가 각자 접시에 고기들을 얹어 주었다. 애들은 너무 배가 고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건성으로 대답하며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고소한 삼겹살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시범 연습까지 하고 나니까 시합 코앞인 거 실감 나지?”

“완전 실감 나요. 겨루기 시합하다가 코피 터진 이후론 절대 시합 같은 거 안 나가려고 했는데!”

“그 시합이랑 이 시합이랑 같냐?”

그새 지후랑 시후가 또 투덕거렸다. 지후는 겨루기 시합 때 자기가 얼마나 장렬하게 졌는지 한참을 떠벌렸다. 

“근데 이나 너는 진짜로 겨루기랑 품새 안 나갈 거야? 아깝지 않아?”

진아 언니가 야무지게 싼 쌈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매운 청양고추를 반으로 분질러 쌈장에 찍어 먹고 있던 이나는 “전혀.” 하고 대답했다. 대수롭지 않은 그 대답에 다른 애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내심 이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태권체조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다 같이하는 거라 개인 역량을 발휘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전국 경기에서도 독보적으로 돋보이는 실력을 갖춘 이나인데, 아쉽지 않을 리가 없을 거라 다들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겨루기도 잘하고 품새도 잘하잖아. 준비 못 했어도 평소 실력이면 메달권일 텐데. 관장님은 너 체육중 보내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너는 별로야?”

“에이, 그건 관장님 생각이지. 관장님은 자기가 학교 다닐 것도 아니면서 집착하더라.”

이나는 매워서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도 남은 청양고추 반개를 또 입에 밀어 넣었다. 이나가 불이 난 혓바닥을 달래 가며 은근슬쩍 관장님 욕을 하자 다들 소리 없이 큭큭거렸다. 

“메달 따면 좋지. 신나고. 근데 그거 때문에 태권도 한 건 아니라서.”

“오, 그럼 뭐 때문에 한 건데?”

서하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음, 러브?”

“뭐?”

엉뚱한 이나의 대답에 다들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진짜야! 난 태권도 정신 외울 때, 발차기할 때 지르기할 때 기합 넣을 때 막 두근거린다고. 근데 관장님이 하도 메달 메달, 일등 일등 하니까 사랑이 시들시들해진 거지.”

이나가 억울하다는 듯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메달 따고 일등하고 그러면 사랑이 더 샘솟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나 같으면 더 욕심날 것 같은데.”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시후가 묻자 지후도 옆에서 거들었다. 

“음…… 메달을 못 따도, 일등을 못 해도 나는 태권도를 좋아하거든. 근데 이겨야지, 이겨야지, 이길 거야! 이겨야 해! 이렇게 외우면서 태권도 동작들을 아무 생각 없이 하다 보면 자꾸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까먹게 되더라고.‘왜 하고 있지?’ 싶은 거지.”

“아, 나도 그거 알아. 좋아해서 잘하고 싶은 거랑 잘 해내야만 한다고 아득바득하는 거랑 다른 것 같아.”

름이가 이나 말에 공감한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평소에 자기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는 름이어서 모두의 시선이 름이에게 쏠렸다. 그러자 름이는 빼꼼 내밀었던 고개를 서하 뒤로 쏙 숨겨 버렸다. 덩치가 다 가려지지 않아 좀 웃겼다. 

“그건 그렇고 나는 름이가 이렇게 끝까지 버틸 줄 상상도 못 했어. 솔직히 금방 그만둘 줄 알았거든.”

지후가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니까! 처음에 달리기하는 거 보고 한 3일 나오다 못하겠다고 내뺄 줄 알았지.”

시후까지 추임새를 넣자 름이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나도 오, 오기가 있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름이의 대꾸에 다시 한번 애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맞다. 이거.”

그때 름이가 생각났다는 듯 가방을 뒤져 공책 하나를 꺼냈다. 원래 가지고 다니던 수첩보다 한 뼘 정도 더 큰 무지 연습장이었다. 름이는 휘리릭 연습장을 넘겨 보더니, 중간중간 그림 있는 데를 찾아 찢었다. 그리고 그걸 한 장씩 아이들에게 나눠 줬다. 

“오! 뭐야, 나잖아?”

“우와. 내가 이런 표정으로 연습했어?”

“코팅해서 주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돼서.”

잘 익은 열매처럼 얼굴이 빨개진 름이가 좀 창피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애들은 저마다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느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간간이 스케치만 해 놨던 건 줄 알았는데 색연필로 꼼꼼하게 칠해 놓기까지 한 완성된 그림이었다.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색감이 훌륭했다. 거친 동작을 하고 있는 모습인데도 부드러운 색채 때문에 편안해 보였다. 름이 특유의 다정함이 느껴지는 그림들이었다. 

“이야.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걸 뚝딱뚝딱 그리는 거야?”

“그러게. 너희 아빠는 진짜 반성해야겠다. 이런 재능을 썩히려 들다니.”

이나가 자기 일처럼 씩씩거리자 름이가 공책을 다시 챙겨 넣으며 작게 대답했다. 

“아, 있지, 사실 나 이번 시합 끝나면 태권도 관두고 미술 학원 다니기로 했어.”

“뭐? 진짜?”

야단스러운 애들의 반응에 름이가 쑥스럽게 웃으며 코끝을 긁적였다. 

“서하가 아빠랑 다시 진지하게 얘기해 보라고 했거든. 생각해 보니까 내 생각을 제대로 얘기해 본 적이 없더라고. 어차피 안 들어주겠지 싶어서.”

“오, 그럼 바로 설득한 거야?”

“그건 아니고. 한 열두 번쯤 시도했지.”

뜻밖에도 름이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부끄러움 때문에 여전히 얼굴이 붉었지만 전보단 한결 편해 보였다. 

“아빠는 내가 뭘 하든 미적지근한 태도여서 못 미더웠대. 그림도 도중에 포기할 게 뻔히 보인다더라고. 그래서 시험해 보라고 했어.”

“시험?”

“응. 태권체조 시작한 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해낼 테니까 한 번만 믿어 주라고 했어. 내가 몸 움직이는 거 싫어하고 체력도 떨어지는 거 아니까 아마 금방 그만둘 줄 알았을 거야, 우리 아빠도.”

자기 입으로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민망했는지 름이가 또 벙긋 웃었다. 하지만 애들은 그 순한 웃음 뒤에 얼마나 큰 노력이 숨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면서도 끝까지 운동장을 달리고, 후들거리는 팔다리로 지르기와 발차기를 수없이 연습하던 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팀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 름이가 남몰래 세 배 네 배로 연습했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나 못한다고 쫓아내지 않아 줘서 고마워.”

름이는 배시시 웃었다. 포기하지 않고 해낸 사람만 지을 수 있는 뿌듯한 미소였다. 

“뭔 소리야. 우리가 고맙지. 이렇게 멋진 선물까지 받고. 름이 너 진짜 대단해. 뭘 하든 잘할 거야.”

이나가 벅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름이를 추켜세웠다. 직접 시범을 보여 보면 어떻겠냐고 조언해 주고, 선선히 팀에도 들어와 준 름이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흠. 우리 름이가 좀 대단하긴 하지.”

서하는 마치 자기가 칭찬받은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진아 언니가 “나만 외로워!” 하며 울부짖어 다들 또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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