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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Mar 08. 2023

14. 모닥불 앞에서

14. 모닥불 앞에서

     

맛있는 고기를 실컷 먹고 순서대로 씻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오자 어느새 잘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잠자리에 들었을 텐데 어쩐 일인지 고모가 외투를 챙겨 줬다. 

“합숙까지 왔는데 그냥 자면 아쉽지. 가볍게 모닥불 좀 피워 봤다. 다들 따뜻하게 챙겨 입고 나와 봐.”

“우와!”

생각지 못한 이벤트에 신이 난 애들은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갔다. 공터에는 정말로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고 있었다. 나무 타는 소리와 냄새가 좋았다. 여름밤이라 바람도 선선했다. 다들 옹기종기 불 앞으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따뜻한 모닥불에 손을 쬐자 온몸이 노곤해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연습을 하느라 곤두서 있던 신경이 느슨하게 늘어지는 것 같았다. 긴장이 풀어지자 애들은 불빛이 가볍게 일렁이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풋.”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이야, 이런 불에는 밤이나 고구마 같은 거 딱 넣어서 후후 불어 가며 먹어야 하는데.”

진아 언니는 역시나 먹을 거 얘기부터 꺼냈다. 그렇게 먹고도 또 먹을 거 생각이 나냐고 지후가 놀라자 “먹는 게 남는 거야.” 하고 낄낄거렸다. 실없는 얘기들을 나누며 시시덕거리는 동안 시간은 부드럽게 흘렀다. 밤이 조금씩 깊어져 갔다. 

 “우와, 별 좀 봐. 진짜 많다.”

서하가 감탄을 하며 말했다. 다들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많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운동장에서 하늘 올려다볼 땐 만날 어질어질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좋네.”

시후가 애어른처럼 느긋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진짜 여름 방학이 이렇게 금방 갈 줄 몰랐어. 아무것도 안 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엄청 많은 걸 한 것 같기도 하고.”

름이가 손가락으로 흙 위에 웃는 얼굴 여섯 명을 그리며 말했다. 

“그러게. 연습할 땐 너무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까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는데, 싶고.”

이나는 기지개를 쭉 펴며 아쉽기도 후련하기도 한 듯 쭝얼거렸다. 

“너네랑 이러고 있는 거 상상도 못 했는데.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다니까.”

서하가 말을 보태며 름이의 그림 옆에다 ‘태권체조 팀 파이팅!’ 하고 적었다. 주거니 받거니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가 다정하고 정겨웠다. 쉼 없이 흔들리는 불길 앞에 바짝 붙어 앉아 있어서인지 다들 한 뼘쯤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명 두 명 졸기 시작하고 이야기가 뜨문뜨문 끊어질 때쯤 지후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있지, 그때 분식점에서 그렇게 말한 거 미안.”

“에이, 다 지나간 일인데, 뭘.”

서하가 뭘 그런 걸 아직 신경 쓰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 진짜. 하면 할수록 그깟 몇 분이 아니야. 죽겠어, 아주.”

지후는 불쑥 그때 얘기를 꺼낸 게 어색했는지 너스레를 떨었다. 민망해하면서도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 사과하는 마음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서 다들 맞장구를 쳐 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짧은 침묵을 깨고 이번엔 시후가 입을 열었다. 

“지나간 일이긴 한데 세찬이 일도…… 미안해. 우리가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굴었던 거. 세찬이 제대로 말리지 않은 거. 다 두고두고 맘에 걸리더라.”

쥐어 짜내는 것 같은 목소리로 시후가 말을 이어 나갔다. 

“걔 옆에 누가 있어 줬음 싶다가도, 그렇게 구는데 누가 버티겠나 싶고. 그래도 저렇게 그냥 두면 안 될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 솔직히 아직도 어려운 거 같아.”

다시 또 다들 조용해졌다. 전에 그렇게 뛰쳐나가 버린 뒤로 세찬이는 도장에 나오지 않았다. 관장님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집에 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혹시 관장님이 심하게 굴진 않았는지 걱정이 됐지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세찬이는 지금, 어쩌고 있을까? 

세찬이만 생각하면 마음에 뭐가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나도  이런데 가장 가까웠던 시후 지후는 말할 것도 없겠지. 서하에게 사과했다고는 하지만 그때 세찬이가 했던 행동은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이나는 한숨을 삼켰다. 문득 아까 진아 언니가 해 줬던 말이 생각났다. 

“좀 망치면 어떠냐? 완벽하게 못 하면 어때. 다시 하면 돼.”

그 말에 얼마나 안도가 됐었는지. 그 순간의 감정을 떠올리자 조금은 마음이 물러졌다. 사람이란 존재도 완벽할 순 없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합 때마다 다친 고양이처럼 온 신경이 곤두서 있던 세찬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잘해 보자고 악수를 청하면 저리 치우라고 쳐내던 손끝이 얼마나 차가웠는지도 기억났다. 긴장으로 바짝 굳어진 어깨, 쉴 새 없이 떨던 다리. 그런 것들이 어렴풋이 떠올라 이나는 조금 슬퍼졌다. 관장님이 다른 애들 다 보는 앞에서 세찬이를 그렇게 몰아붙이지만 않았다면……. 

자주 시비를 걸고 어이없는 오기를 부릴 때가 잦았지만 사실 세찬이 자체만 놓고 보면 나쁜 애는 아니었다. 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4년 동안 봐 왔으니 알 수 있었다. 이나가 태권도를 하며 점점 피어나는 동안, 세찬이는 태권도를 하며 점점 일그러졌다. 

마냥 재밌고 즐겁게만 할 수 있다는 것도 어떤 행운 같은 걸까? 고모가 세찬이네 아빠처럼 메달에 목숨 걸고 시합에서 질 때마다 넌 실패한 거라고 다그친다면……. 눈앞이 캄캄하고 숨이 막혔다. 내내 이런 기분들 속에 잠겨 있을 세찬이를 떠올리니 이나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관계라는 게 다 어려운 거야. 걔가 잘못한 건 맞지만 또 단번에 끊어 내기 힘든 너희 마음도 이해는 가. 이때 써먹을 우리 양 여사님 말이 또 있지.”

“오. 명대사 제조기 양 여사님 빛나는 어록 또 나오는 거야?”

“그러엄. 뭐냐면 바로! 어쩔 수 없는 건 내버려 두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

진아 언니가 두 손을 앞으로 뻗더니 마치 선포하듯 말했다. 거대한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진중하고 엄숙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리숙하게 꾸며 낸 연기를 계속 이어 나가기 힘들었는지 진아 언니의 볼이 씰룩거렸다. 그리고 곧 자기 혼자 “푸하하.” 웃고 말았다. 한참을 킬킬대던 진아 언니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이번엔 정말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누구도 단번에 누군가를 바꿀 순 없어. 그래도 힘들어할 땐 얘기 들어주고, 못되게 굴면 구박도 해 주고. 괜찮은 친구로 있어 주는 것 정돈 할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후후 쌍둥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은 각자 생각에 잠긴 것처럼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여튼! 그러니까 풀 죽지 말고 기운 내. 허리 펴고!”

진아 언니가 버럭 소리 지르듯 기합을 내지르곤 벌렁 뒤로 누웠다. 

“아, 배부르고 따땃하니까 졸리다. 내가 졸업 전에 이런 걸 하게 될지 몰랐는데. 값진 은하수 젤리 쿠키 얻어먹었네. 오, 말하다 보니까 저기 저 별이 그 쿠키랑 닮았는데?”

 진지하게 말하다가 금세 딴 얘기로 빠져 버린 진아 언니 때문에 애들은 그제야 다시 웃었다. 잠잠하게 타오르던 불길이 조금씩 사그라지고 수런거리던 아이들의 목소리도 조금씩 작아졌다. 잠에 취한 누군가가 하품을 하자 다들 따라 하품을 했다. 떠들썩했던 합숙일 밤이 가물가물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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