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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Mar 09. 2023

15. 도 대회

15. 도 대회


후덥지근하던 날씨가 수그러들었다. 언제 끝나나 싶었던 여름 방학은 그새 끝나 있었다. 대신 시합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이들은 그사이 새롭게 짠 동작들을 점검하고 매일 똑같은 훈련을 반복했다. 연습, 또 연습. 지겨울 법한 일상이 이어졌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겨우 이틀 남짓 합숙 훈련을 다녀왔을 뿐인데, 그때의 기억이 아이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붙들어 줬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웃고 많이 떠들고 평소보다 조금 가까이 붙어 앉아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 사소하지만 다정했던 순간들이 아이들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 주었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린 것도 큰 수확이었다. 이나는 그동안 자기만 그런 불안에 시달렸던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름이도, 서하도, 심지어 후후 쌍둥이까지도. 다들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끝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태평한 진아 언니의 성격에 도움을 받은 건 팀 모두였다. 체격도 다르고 몸에 밴 습관도 다른 사람들 여럿이 한 호흡으로 같이 움직인다는 건 사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같이 망가질 거라는 부담감이 항상 있었다. 그리고 그 부담감은 안타깝게도 잦은 실수로 돌아왔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합숙 훈련을 하면서 ‘좋은 팀’의 조건을 배운 후로는 다들 여유가 생겼다. 만약 한 사람이 실수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흔들림 없이 자기 몫을 해낸다면 틀림없이 괜찮을 거라는 믿음. 그런 믿음이 생기고 나니 더는 두렵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시합 날이었다. 관장님은 끝까지 이나네 팀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등 태권도장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는 없다며 끝내 대회 접수를 승인해 주지 않았다. 관장님의 비겁한 행동에 화가 난 팀 애들은 단체로 도장을 그만둬 버렸다. 여섯 명이 동시에 그만두면 관장님도 조금은 깨닫는 게 있지 않을까 했지만, 관장님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나네 고모가 따로 절차를 밟아 접수를 하고, 도장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무지 도복을 새로 사 와서 나눠 줬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빳빳한 새 도복을 받아들자 기분이 묘했다. 

“고모, 근데 진짜 고모도 도장 그만둔 거야? 앞으로 어쩌려고.”

시합이 열리는 도내 체육관 앞에 다 와서도 이나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당장 눈앞의 시합보다 고모 일이 더 신경 쓰였다. 다른 애들까지 신경 쓸까 봐 몰래 속닥거리자 고모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도장을 차려 버리려고.”

“에엑? 진심이야?”

고모의 명랑한 대답에 이나는 화들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었다. 밤마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뭔가를 적어 대던 고모의 모습이 퍼뜩 떠올랐다.

“돈은?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거 아니야? 우리 빚 생기는 거야?”

온갖 생각들로 머리가 멍해진 이나는 횡설수설하며 고모를 다그쳤다. 그러자 고모가 가볍게 웃었다.

“별걸 다 걱정한다. 너 때문 아니고 계속 생각했던 거야. 내 이름으로 된 도장 차리는 거 오랜 꿈이었어. 지금이 딱인 것 같아서 결정한 거야.”

고모가 이나의 도복 띠를 다시 야무지게 매주며 말했다. 고모의 표정이 가뿐하고 후련해 보여 이나는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고민거리가 덜어지자 잊고 있던 긴장감이 확 밀려들었다.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체육관으로 들어서자 진짜 시합 날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도 대회가 열리는 체육관은 달뜬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전 지역에서 속속들이 모인 태권도 팀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태권도 시합은 참가하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다양해서 시합장의 분위기가 상당히 부산스러웠다. 사람이 꽉 차 있어 누가 어디 팀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태권도장마다 정해진 구역이 있어 간신히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반복해서 울렸고 여기저기서 기합 소리가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널찍한 체육관 바닥엔 다치지 않도록 매트가 깔려 있었고 심사위원들이 앉을 자리와 시합이 이뤄질 자리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엇, 저기 우리 태권도장 자리인가 봐.”

지후가 일등 태권도장 플래카드가 걸린 좌석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얼결에 ‘우리 태권도장’이라고 말한 게 민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다녔으니 입에 밸 만했다. 솔직히 익숙한 얼굴들을 보니 반갑기도 했다. 몇몇 애들도 이나네 팀을 봤는지 손을 번쩍 들어 인사를 했다. 그러자 맨 앞줄에 서서 출석 인원을 확인하고 있던 관장님이 힐끗 이나네 쪽을 봤다. 골치를 썩이다 나가 버린 제자들이 그다지 반갑진 않았는지,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나 팀 자리와 일등 태권도 팀 자리는 가까웠다. 같은 지역이니 당연했다. 달갑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나랑 애들은 쭈뼛쭈뼛 자리로 향했다. 고집스럽게 입을 일자로 다문 관장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관장님 성격에 이나 고모나 이나에게 한마디 할 법도 했지만 그럴 정신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나 고모가 도장 애들을 일일이 챙기고 잡다한 일들도 다 알아서 처리했을 텐데, 지금은 혼자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니 혼이 쏙 빠진 것 같았다. 대기 시간도 긴데 내내 눈치를 봐야 할까 걱정했던 이나는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고학년 애들 거의 다 빠져 버려서 관장님 타격 좀 있겠네. 진짜 메달 딸 애가 세찬이밖에 없겠는데?”

서하가 이나 귀에다 대고 속닥거렸다. 이나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눈으로 세찬이를 찾았다. 안 그래도 부담이 클 텐데 이런 상황이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도장에서 그 일이 있었던 후로 세찬이와는 학교에서도 본체만체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세찬이는 이제 전처럼 시비를 걸거나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그저 주변 사람들이 아예 안 보이는 것처럼 굴었다. 눈이 마주쳐도 인사하는 법이 없었고 말을 걸어 보려 해도 슥 지나가 버렸다. 후후 쌍둥이와도 거리를 둔 것 같았다.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대체로 엎드려만 있었다. 투명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구는 세찬이를 보면 입 안이 썼다. 서하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돌려차기를 백 번쯤 더 해 지구 끝까지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새파랗게 질려 도장을 뛰쳐나가던 모습을 생각하면 또 마음이 술렁였다. 후후 쌍둥이가 했던 말들이 이해가 갔다. 세찬이가 딱히 원하지 않겠지만 잘하라고 한두 마디 정도는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시합 시간이 다 되도록 세찬이는 보이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시합이 시작되자 애들은 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리를 달달 떨었다. 

 “으악, 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으억, 나는 배 속이 이상해. 벌레들이 우글우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시후랑 지후가 서로 어깨를 부여잡고 몸을 비틀어 댔다. 

“나, 나, 화,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시합장에 와서도 습관적으로 그림을 그리려다 종이를 구겨 버린 름이는 결국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쟤 너무 긴장해서 토하는 거 아니야?”

서하는 걱정이 된다며 그 뒤를 쫓아갔다. 간식으로 준비된 빵과 바나나를 번갈아 가며 우물거리고 있는 진아 언니만 태평해 보였다. 이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회 순서표를 다시 살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태권체조 팀은 총 열 팀이었다.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팀들은 첫 참가가 아닌지 제법 여유로워 보였다. 심지어 저학년들로만 이뤄진 팀들도 별로 긴장하지 않은 것 같았다. 소풍 온 것처럼 과자와 음료수를 나눠 먹으며 재잘거리기 바빴다. 

이나네 팀 순서는 아홉 번째였다. 거의 마지막 순서라 한참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마지막 팀이 아닌 걸 위로로 삼으며 이나는 물 한 병을 앉은자리에서 다 마셨다. 땀이 고이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차라리 빨리 시합을 끝내 버리면 후련해질 것 같은데 규모가 큰 대회라 대기 시간이 한없이 늘어졌다. 하염없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속이 좀 메스꺼웠다.

“언니, 나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

이나는 진아 언니에게 말을 해 놓고 일어났다. 가볍게라도 몸을 풀어 놓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복잡하고 시끄럽던 안에서 벗어나니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나는 커다란 체육관 주위를 타박타박 걸었다. 가볍게 뛰고 싶기도 했지만, 미리 진을 빼면 안 될 것 같았다. 짧게 숨을 끊어서 뱉으며 천천히 걷고 있는데 건물 한편 구석진 데에 누가 쭈그려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공벌레처럼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는 애는 분명 이나가 알고 있는 애였다. 지세찬.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던 세찬이가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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