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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Mar 09. 2023

16. 태권도 정신의 뜻

16. 태권도 정신의 뜻


이나는 머뭇거리다가 세찬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길게 늘어진 건물 그림자 안에 세찬이가 뒤섞여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겨루기 시합, 얼마 안 남지 않았어?”

이나가 조촘거리며 다가가 묻자 세찬이는 힐끗 위를 올려다봤다. 시선이 맞지 않는 게 영 어색해 이나는 그 옆에 발을 쭉 뻗고 철퍼덕 앉아 버렸다. 

“허리는 이제 괜찮아? 치료는 받았어?”

이나가 물었다. 세찬이는 대꾸 없이 바로 일어났다. 아까랑 반대로 이번엔 이나가 세찬이를 올려다봤다. 그늘 안이라 그런지 세찬이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 어울려.”

“뭐?”

“청승맞게 구는 거 하나도 안 어울린다고.”

이나가 다시 발딱 일어서며 소리쳤다. 고집스럽게 다문 세찬이의 입매는 관장님과 똑 닮아 있었다. 세찬이는 말없이 입술만 잘근잘근 짓씹었다. 삐딱하게 서 있는 자세도, 좁아진 미간도, 일그러진 눈매도 전부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세찬이는 아직 띠도 안 매고 있었다. 쩍쩍 금이 가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것 같은 세찬이 때문에 자꾸 목이 조여 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나는 어쩐지 목 안이 따끔거리는 것 같아 침을 꿀꺽 한 번 삼키고 인상을 썼다.

“야, 시합 나가기 싫으면 싫다고 해! 아파서 못 하겠으면 못 하겠다고 하라고!”

이나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자 세찬이의 표정이 조금씩 무너졌다. 

 “네가 무슨 상관인데? 넌 뭐가 그렇게 잘나서 만날 참견인데?”

세찬이가 이를 악물고 되물었다. 잔뜩 비틀린 목소리였지만 그거라도 들으니 차라리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잘나서 참견하는 게 아니야.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참견하는 거지. 너도 지후 시후 일에 끼어든 적 있잖아.”

옛날 일을 꺼낼지 몰랐는지 세찬이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억지로 쓰고 있던 가면이 조금 벗겨진 것 같았다.

“있지 지세찬. 너 자신한테도 남한테도 좀 잘해 줘 봐.”

그 말에 세찬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 좀 숙이지 말고! 다른 사람이 널 막 대하게 두지 마. 너도 다른 사람 막 대하지 좀 말고. 하고 싶지 않은 거 억지로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건 좀 제대로 하고. 어떤 게 너한테 이로울지 잘 선택하란 말이야.”

어떻게든 잘 풀어서 얘기해 보려던 이나는 결국 볼멘 목소리로 타박하고 말았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세찬이는 헝클어진 도복 자락만 물끄러미 쳐다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내가 선택이란 걸, 할 수 있긴 해?”

세찬이가 물었다. 짧은 물음이었지만 그 안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관장님이 세찬이를 무섭게 윽박지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불안한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한없이 쭈그러들던 세찬이의 모습도. 이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어릴 때 생각이 났다. 구석진 데만 찾아 고모가 찾으러 올 때까지 하염없이 쭈그려 앉아 있던 날들이 떠올랐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버려지고 싶지 않고. 이나도 그 감정이 뭔지 알았다. 

“야. 있지, 너 그거 알아? 우리 엄마 아빠 이혼하고 둘 다 나 안 맡겠다고 서로 미뤘다?”

이나가 대답 대신 문득 자기 얘기를 꺼내자 세찬이가 움찔했다. 너희 고모가 너 불쌍해서 잘해 주는 거라고 말해 버렸던 그날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사범님이 이나를 처음 도장에 데려왔던 날, 관장님이 쯧쯧 혀를 찼던 걸 이나도 세찬이도 기억하고 있었다. 

“결혼은 어떻게 하려고 다 큰 애를 떠맡아? 양육비는 받기로 한 거야?”

말을 거를 줄 모르는 관장님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사범님은 무뚝뚝하게 “제가 알아서 합니다.” 하고 말았다. 일곱 살 때라 기억이 선명하진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시 이나는 말도 없고 남들과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한동안은 도장에 와서도 앉아 있기만 했다. 사범님은 이나를 억지로 다그치지 않았다. 정물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만 가도 내버려 뒀다. 대신 하루에 한 번씩은 꼭 태권도 정신을 외치게 했다. 

“예의, 염치, 인내, 극기, 백절불굴! 어이!”

똑바른 자세로 서서 배에 힘을 딱 주고 제대로 외치라고, 잘하고 있다고. 묵묵히 응원하던 사범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부터였지. 이나의 표정이 달라진 게.’

앉아만 있던 이나가 어느 날부터인가 일어나서 주먹 쥐는 연습을 하고 지르기 동작을 연습하고 발차기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태권도 정신을 외치는 이나의 표정이 반짝, 빛나기 시작했던 때가 분명 있었다. 

이나는 고모가 단단하게 매준 띠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엄마도 싫다지, 아빠도 싫다지. 그럼 난 왜 태어났을까, 그런 생각 했어.”

불쑥 그 말을 꺼냈을 때, 고모가 짓던 표정이 아직 생생했다. 영원히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이나는 막연히 생각했다. 고모는 울지 않았지만 우는 것처럼 보였고, 말로 다 하지 않았지만 가만히 안아 주는 걸로 모든 말을 대신했다. 그 포옹이 이나를 안심시켰다. 

“너 태권도 정신의 뜻이 뭔지 알아?”

자기 얘기를 조곤조곤 털어놓던 이나가 대뜸 엉뚱한 걸 물었다. 세찬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딱히 태권도 정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예의 바르다는 건, 남을 존중할 줄 안다는 거야. 부끄러운 걸 안다는 건, 후회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거야.”

예의와 염치없는 애라는 말을 직접 듣기라도 한 것처럼 세찬이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이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힘들어도 참아 낼 줄 알아야 한다는 건, 그 너머에 더 기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걸 믿는다는 거야. 포기하지 않아야 다음이 있는 거고, 백번을 꺾어도 내 안에 있는 용기는…… 누구도 없앨 수 없는 거야.”

읊조리듯, 아니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이나가 태권도 정신의 뜻을 풀어 말했다. 어린 이나가 밤마다 깨어 울 때, 토닥토닥 느리게 이나의 등을 몇 번씩이고 쓸어 주며 고모가 해 줬던 말들이었다. 그 뜻이 맞든 틀리든 그건 상관없었다. 수천 번의 똑같은 이야기를 수천 밤 동안 들으며 이나는 사랑을 배웠다. 이나는 이제 무엇도 의심하지 않았다. 

“고모랑 둘이 살게 되고 한참 지났을 때 나도 똑같이 물어봤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냐고. 우리 고모가 뭐라 그랬게?”

이나가 무거워지지 않으려고 씩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 내내 말이 없던 세찬이가 툭 가볍게 대꾸했다. 

“몰라. 우리 아빠가 할 말은 안 들어도 알겠다. 쪼그만 것들이 선택은 무슨 선택이냐고 그랬겠지.”

부루퉁한 세찬이의 얼굴을 보며 이나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천천히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즐거움. 행복. 기분 좋은 많은 일들.”

그 말에 세찬이의 얼굴이 잠깐 멍해졌다. 

“……그런 걸, 선택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세찬이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조금 그러다 그다음엔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 없다는 듯.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는 듯. 

“남의 선택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래. 근데 ‘내 선택’은 내가 할 수 있대. 엄마 아빠가 이혼한 건 엄마 아빠 선택이지만, 고모랑 행복하게 사는 건 내 선택이었어.”

이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세찬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겁에 질린 작은 동물처럼 도망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나는 세찬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순 없대. 좋은지 싫은지 스스로한테 물어보는 연습부터 해 봐야 된대. 지세찬, 너 시합 나가는 거 좋아?”

정지된 것처럼 서 있던 세찬이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세찬, 너희 아빠가 너 막 윽박지르는 거 좋아?”

이번에도, 세찬이는 고개를 저었다. 

“지세찬,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이나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번에는 세찬이도 이나를 똑바로 마주 봤다. 세찬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직도 그늘진 데 서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이나는 세찬이의 소맷자락을 조금 잡아당겼다. 세찬이는 순순히 끌려 나오며 막막히 되물었다. 

“내 선택이란 걸, 내가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네 인생이잖아.”

단호한 이나의 말에 세찬이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세찬이는 울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세게 한 번 깨물었다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선언하듯 말했다. 

“나, 시합 하나도 안 좋아해. 순위 매기는 거 지긋지긋해. 그리고 아빠가 소리 지르면, 그냥, 그대로 사라지고 싶어.”

세찬이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뜨겁게 달아올라 있을 경기장 안과 달리 바깥은 사위가 조용했다. 온갖 소음이 한꺼번에 제거된 것처럼 느껴졌다. 분리되어 있는 낯선 세계에 도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나는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으로 본심을 내뱉은 세찬이의 얼굴은 붉디붉었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는 이나는 그 모습이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이나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그대로 쭉 앞으로 뻗었다. 그걸 응시하던 세찬이가 천천히 같이 주먹을 뻗었다. 툭, 둘의 주먹이 가볍게 부딪혔다.

태권도의 꽃은 발차기지만 태권도의 기본은 주먹쥐기다. 손끝에서부터 손바닥까지 그러모으듯 쥐어 엄지로 꽉 잠가 줄 것. 단단하게 쥔 주먹은 누구를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세찬이가 더는 남을 해치지 않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며 이나는 덧붙였다. 

“뭘 하든, 너는 그냥 너야.”

이나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진아 언니의 말처럼 누구도 누군가를 쉽게 바꿀 순 없었다. 그저 작은 마음 한 조각이 조금이나마 가닿길 바랄 수밖에. 

멋있는 척 딱 돌아서고 나니 얼굴이 확 달아올라 이나는 두 뺨을 마구 문질렀다. 말할 땐 몰랐는데 멋대로 속엣말을 다 쏟아붓고 나니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에 이나는 “으으, 어쨌든 기운 좀 내라고 인마!” 하고 소리를 지른 뒤 체육관으로 달려가 버렸다. 세찬이는 우두커니 서서 빠르게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을 한참 보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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