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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Mar 10. 2023

18. 완벽하진 않았지만 완벽한 것처럼 느껴진 날

18. 완벽하진 않았지만 완벽한 것처럼 느껴진 날


이나네 팀은 꾸벅 마무리 인사를 했다. 돌아서서 나오는데 울컥, 뭔가 뜨거운 게 가슴속 깊은 데서 치밀어 올랐다. 익숙하지 않은 그 감각에 이나는 가슴께를 꾹꾹 눌렀다. 다 끝날 때까지 긴장감을 풀지 않고 있던 아이들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는 뿌듯함과 진득한 아쉬움이 아이들의 얼굴에 묻어났다. 이나와 아이들은 온갖 가지 감정들이 밀려드는 걸 느끼며 대기석 쪽으로 향했다.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던 양 여사님과 이나네 고모가 제일 먼저 보였다. 그 뒤로 서하네 엄마, 지후 시후 아빠, 름이 아빠가 차례로 보였다. 모두 엄지를 치켜들고 있었다. 특히 름이네 아빠는 손수건으로 눈물까지 찍어 내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낸 름이가 더없이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재밌게 하고 왔어?”

이나가 자리로 돌아오자 고모가 씩 웃으며 물었다. 

“완전! 최고로 재밌었어.”

이나는 잔뜩 흥분해 대답했다. 여섯 아이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해낸 거야. 진짜로! 겨루기 메달 백 개 딴 것보다 더 좋아.”

이나가 겨루기 스텝 밟는 시늉을 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렇게 벅찼던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해냈다는 것. 그것이 주는 만족감은 새롭고 경이로웠다. 

“아, 실수만 안 했으면 완벽했는데.”

신나서 날아다니는 이나와 달리 시후는 실수한 게 내심 걸렸는지 시무룩해져 중얼거렸다. 마지막에 삐끗한 진아 언니랑 름이도 아쉬운 표정이었다. 

“너무 완벽하면 인간미 떨어져서 안 돼. 충분히 잘했어.”

서하가 신경도 쓰지 말라는 듯 바로 다독였다. 

“그래. 또 도전하면 되지. 우리 이제 시작 아니야?”

지후가 씩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 위로 다른 아이들이 손을 포갰다. 

“이겨도 져도 우리는 하나! 아자 아자!”

시합에 들어가기 전처럼, 끝나고 나서도 구호를 외치자 정말로 하나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떤 결과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저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등 태권도장 좌석 쪽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지세찬 이 녀석 어디 갔어? 시간 다 됐는데!”

관장님의 고함이 들려왔다. 품새 시합과 겨루기 시합에 연달아 나가기로 되어 있던 세찬이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관장님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다음 순서를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때 세찬이가 저만치서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걸어왔다. 저번처럼 큰일이 날까 싶었는지 후후 쌍둥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이나가 목소리를 낮춰 소곤소곤 말했다. 

“걱정 마. 괜찮을 거야.”

의아한 듯 후후 쌍둥이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나는 그저 싱긋 웃어 보였다. 아까 돌아서기 전에 봤던 세찬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늘에서 딱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쏟아지는 가을볕이 따사로워서인지 세찬이의 얼굴이 좀 더 또렷하게 보이던 게 기억났다. 

세찬이는 처음으로 관장님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그리고 꾸벅 인사를 하고 도복과 띠를 반납했다. 관장님의 얼굴이 푸르락누르락했다. 무슨 말이 오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세찬이는 결국 겨루기 시합에 참가하지 않고 그대로 시합장을 나가 버렸다. 뒤돌아 나가는 세찬이의 걸음이 어쩐지 후련해 보여 이나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관장님은 세찬이를 잡지 않았다. 대신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나머지 애들을 지도했다. 

세찬이도 없고 이나도 없어 메달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저학년 애들 중 눈에 띄지 않던 애들 두 명이 동메달,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단상 위에 올라선 그 애들을 보는 관장님의 눈빛이 새롭게 번뜩이는 것 같아 이나는 오싹해진 팔뚝을 문질렀다. 

아쉽게도 이나네 팀은 메달을 따지 못했다. 이나가 시합에 나가 메달을 따지 못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금메달과 은메달만 휩쓸던 예전보다 훨씬 뿌듯했다. 손이 아플 정도로 손뼉을 치는 동안 많은 일들이 스치듯 떠올랐다. 뜨겁게 내리쬐던 햇볕 아래서 숨차게 달렸던 일, 음악을 고르느라 투덕거렸던 일, 손발이 맞지 않아 수없이 부딪히고 넘어졌던 일……. 모든 것들이 아득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벌써부터 그리웠다. 

“야, 쟤넨 2년 만에 우승한 거래. 메달권 있는 애들 다 진작부터 태권체조 해 왔었나 보더라.”

우리도 이만하면 잘한 거라고 서하가 으스대며 말했다. 

“오호. 그러니까 우리가 못 해서 진 게 아니라는 거지?”

“호오. 쟤들이 너무 잘해서 질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

후후 쌍둥이가 번갈아 가며 놀리듯 되물었다.

“당, 당연하지. 우리가 시간까지 이길 순 없었을 뿐인 거라고.”

름이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서하 대신 대답했다. 그 말에 애들이 동시에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삼등 팀이랑 우리랑 소수점 차이밖에 안 나잖아. 이 정도면 뭐, 선방한 거지.”

이번엔 이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었다. 

“아, 나 중학교 가면 너희랑 시간 잘 안 맞을 텐데. 벌써 아쉽다. 그래도 다음번에도 끼워 줄 거지?”

진아 언니가 불쑥 물었다. 학년말이라는 불안함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당연하지. 언니 올 때마다 은하수 젤리 쿠키 세 개 준비해 놓을게!”

서하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 덕에 다시 또 웃음이 터져 한참을 웃었다. 한 번도 불안해 본 적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이나는 팀원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봤다. 태권체조란 걸 알려 준 서하, 선뜻 함께해 주겠다고 했던 름이, 처음엔 재미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해 줬던 후후 쌍둥이, 그리고 억지로 끌려왔으면서도 언제나 든든하게 중심을 잡아 줬던 진아 언니까지. 여섯 명이 함께 발맞춰 걸어온 시간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넌 할 수 있어. 못 하면 또 어때. 다시 하면 되지. 어떤 것도 너보다 중요하진 않아.”

언젠가 고모가 해 줬던 말이 떠올랐다. 고모의 말들은 불쑥불쑥 떠올라 이나를 붙들었다. 고모가 없었다면 무엇도 해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짓궂게 웃으며 배에 힘을 빡 줬다. 

“있지! 우리 고모 태권도장 차릴 거야. 이제 사범님 아니고 관장님이야. 태권도 5단! 합기도 3단! 완전 대박 잘 가르치는 거 알지? 관심 있는 사람은 꼭 와라!” 

시상식까지 다 끝나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사이, 이나가 일등 태권도장 애들에게까지 다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야, 야. 강이나!”

뒤에 서서 흐뭇하게 애들을 둘러보고 있던 고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항상 엄격하던 사범님의 얼굴이 빨개지자 다들 신기하다는 듯 “우와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이 웃겨 이나는 한참을 킥킥거렸다. 

경기장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가을바람이 훅 불어왔다. 하늘은 높고 맑았다. 계절이 달라진 게 실감이 났다. 이나는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시합은 끝났지만 이나네 태권체조 팀은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것뿐이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완벽한 것처럼 느껴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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