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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Mar 10. 2023

17. 이겨도 져도 우리는 하나

17. 이겨도 져도 우리는 하나


이나는 냉큼 자기 자리로 돌아와 순서를 확인했다. 벌써 태권체조 팀들의 경기가 시작된 상태였다. 

“뭐야, 세 번째 팀이야? 으아, 앞에 놓쳤네.”

“뭐 하다 이제 들어왔어. 경기 봐 봐. 쫄깃쫄깃하다, 진짜.”

서하가 잔뜩 흥분해 방방 뛰며 경기장을 가리켰다. 90년대에 유행하던 신나는 디스코 음악을 틀어 놓고 태권체조를 선보이고 있는 팀은 저학년 팀이었다. 

“오, 쟤네는 어떻게 저걸 다 연습했대? 어리면 못 따라올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네.”

“그러게. 와, 쟤들 손 뻗는 거 봐라. 다리 터는 거 대박.”

시후랑 지후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쉬운 동작들로 구성했는데 단조롭지 않고 괜찮네.”

진아 언니도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름이는 어느새 아까 구겨 버렸던 종이를 다시 찾아 다른 팀들이 짠 안무들을 끼적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감상을 늘어놓으며 경연에 집중했다. 우승팀이 보여 줬던 공연이랑은 확실히 차이가 났지만, 남들의 경연을 보는 것도 충분히  재밌었다. 아이들은 다른 팀들이 어떤 음악을 골랐는지, 어떤 동작을 섞어서 넣었는지 유심히 봤다. ‘다음에 써먹어 봐야지.’ 하는 생각들이 표정에 드러났다. 한 팀 한 팀 경연이 끝날 때마다 긴장감은 점점 높아졌다. 이나는 팀원들의 어깨를 한 번씩 도닥여 주었다. 

드디어 이나네 순서였다. 

“다들 준비됐지? 후회 없게 다 보여 주고 와라. 알겠나?”

“네! 네! 네!”

묵직한 신뢰가 담긴 이나 고모의 말에 이나네 팀은 절도 있게 대답했다. 관장님과 일등 태권도장 애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제 더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함께 훈련해 왔던 서로에게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이겨도 져도 우리는 하나! 아자 아자!”

아이들은 구호를 외치며 한 명 한 명 서로 눈을 맞췄다. 잘하자. 힘내. 틀려도 괜찮아. 말로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 봐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차곡차곡 시간이 쌓인다는 건 그런 거였다. 

여섯 명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절도 있게 심사위원들 앞에 섰다. 무표정한 심사위원들과 눈이 마주치자 긴장감으로 목 뒤가 빳빳해지는 것 같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차렷 자세를 취한 뒤 다 같이 인사를 했다. 매번 인사할 때마다 고개 드는 타이밍이 안 맞았는데 이번엔 딱 맞았다. 느낌이 좋았다. 여섯 명은 준비 자세를 하고 바로 섰다. 심장 소리를 닮은 익숙한 비트가 흘러나왔다. 뜨거운 여름, 쏟아지는 햇빛 아래서 아이들은 이 음악을 수십 번 돌려 들었다. 그동안 갈고 닦았던 걸 드디어 보여 줄 시간이었다. 

‘둥둥둥둥.’

거센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요란한 드럼 소리가 시작을 울렸다. 전율을 일으키는 전자기타 소리에 맞춰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나네 팀은 절도 있게 동작들을 이어 나갔다. 같은 동작이라도 얼마나 절도 있게 선보이느냐에 따라 점수가 달라졌다. 정권찌르기, 몸통막기, 앞차기. 구성했던 동작들이 유려하게 이어졌다. 음악이 반쯤 흘렀을 때 이나는 온몸이 열기로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연습 때 실수가 잦았던 공중돌기 동작을 할 차례였다. 원래는 지후만 대표로 나와 텀블링을 하고 뒤에서 보조 동작들로 받쳐 주기로 했었는데, 영 밍밍하게 느껴져 바꾼 부분이었다. 생전 처음 텀블링을 시도해 본 진아 언니나 름이, 서하, 이나는 이 동작을 익히기 위해 밤낮없이 매트를 굴러다녔다. 처음엔 머리부터 고꾸라질까 봐 얼마나 겁을 먹었었는지. 나 죽는다고 엄살을 부리던 진아 언니의 목소리, 내가 해냈다고 환호성을 내지르던 서하, 자기가 정말로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자기 뺨을 꼬집던 름이까지……. 이나는 멈추지 않고 동작을 해 나가면서도 엉망진창이던 네 명이 처음으로 다 같이 텀블링에 성공했을 때를 떠올렸다. 손뼉을 치며 조회대 위를 빙글빙글 돌던 후후 쌍둥이도 생각났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발돋움을 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착지하는 순간, 짜릿함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쫙 흘렀다. 여섯 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도는 순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다른 시합들도 같이 진행되고 있어 관중석에서 크게 함성을 지르거나 손뼉을 이어 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꺼번에 터진 환호까지 막을 순 없었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을 때, 이나는 그 순간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온 세상이 정지한 것 같은 황홀한 감각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하지만 찰나와 같던 환희의 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이나는 다시 동작들을 이어 나가는 데 집중했다. 음악은 계속되고 있었으니 움직여야 했다.

텀블링 부분이 가장 호응이 좋았지만, 우승팀 주장이 알려 주었던 하우스턴도 반응이 좋았다. 머리랑 상체를 고정시키지 않고 아래쪽으로 두고 다리를 쭉 뻗었다. 몸이 쭉 일자로 곧게 펼쳐지는 느낌의 동작이라 여섯 명 모두가 쏜살같이 쏘아지는 화살처럼 보였다. 음악은 클라이맥스로 향해 가고 있었다. 

반복되는 후렴구가 두 번째로 나왔을 때였다. 엇갈려 비틀어막기를 하는 부분에서 습관처럼 반 박자 빨리 들어간 서하가 멈칫했다. 서하가 살짝 머뭇거리는 사이 옆에서 덩달아 박자를 놓친 시후의 자세가 무너졌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기 때문에 왼팔을 엇걸어 비틀어막기를 해야 하는데, 오른팔로 엇걸어막기를 한 것이었다. 모두가 한 동작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발이 맞지 않은 그 동작은 눈에 확 도드라졌다. 뒤에 있던 이나는 자기도 모르게 손발을 확인했다. 앞에서 동작이 흐트러지자 순간적으로 헷갈린 것이었다. 한 번 균형이 헝클어지자 여섯 명의 박자가 약간씩 어긋났다. 

깔끔하게 떨어져야 할 동작이 무너지자 시후는 당황했다. 연습하는 동안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는데 하필 시합 때 첫 실수를 한 것이었다. 곧바로 반달차기와 뛰어 높이차기를 이어가야 하는데 한 번 허둥거리기 시작하자 연달아 발차기 동작을 하는 게 힘에 부쳤다. 쌍둥이 형의 상태를 눈치챈 지후가 그쪽으로 시선이 쏠리지 않도록 더 힘껏 발차기 동작을 선보였다. 

“괜찮아. 집중해!”

시후의 뒤에 선 이나가 나지막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믿음이 담긴 이나의 눈빛을 시후는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자 한 번의 실수로 중심을 잃고 흔들리던 시후의 등이 꼿꼿해졌다. 다행히 이어지는 뒤후려차기와 몸 돌려차기는 아주 깔끔했다. 내지른 손끝이, 허공을 가르는 발끝이 앞, 뒤, 옆 아이들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여섯 명은 시합 전 외쳤던 구호처럼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음악은 막바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주춤서기를 하며 준비서기 자세로 돌아오는 순간 름이가 휘청했다. 름이의 옆에 선 진아 언니도 같이 삐끗하는 게 보였다.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자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두 사람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심하게 허청거린 것은 아니었으나 마무리 자세라 어쩔 수 없이 눈에 띄었다. 

음악이 끝났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심사위원들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대신 저만치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잘했다! 이야, 멋지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일등 태권도장 자리에 앉아 있던 애들이 일제히 일어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이나네 팀은 더 이상 일등 태권도장 소속이 아니었지만 일등 태권도장석에 앉은 애들은 자기네 팀이 시합을 마친 것처럼 기뻐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관장님은 자기 도장 애들이 떠들썩하게 구는 걸 말리지도 못하고 목석처럼 서 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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