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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Mar 05. 2023

11. 이게 벌이에요?

11. 이게 벌이에요


“뭘, 뭘 찍어? 지세찬, 당장 앞으로 나와서 엎드려뻗쳐! 어디서 못돼먹은 것만 배워 와서는.”

관장님의 언성이 다시 높아졌다. 뒤따라 나온 사범님은 분위기가 아까보다 더 좋지 않자 우선 애들을 흩어지게 했다. 다음 학원 갈 애들을 내보내고 집으로 데려다줘야 할 애들은 차로 보냈다. 그사이 관장님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세찬이의 목덜미를 잡아채 바닥에다 내팽개쳤다. 이나의 발차기에 널브러졌다가 겨우 일어섰던 세찬이는 다시 나동그라졌다. 꾸준히 운동을 해 온 어른의 힘이란 건 이나의 발차기와는 또 달랐다. 패대기쳐진 세찬이는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바로 옆에서 그걸 본 이나와 후후 쌍둥이, 름이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쓸모없는 놈.”

관장님이 엎어진 세찬이 얼굴 바로 옆에다 발을 쾅쾅 내려찍었다. 직접적으로 발로 차진 않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위협적이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 발이 어디로 향했을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전에도 세찬이에게 유독 엄격했던 관장님이었지만 이번엔 엄한 정도가 아니었다. 분명하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관장님이 발을 구를 때마다 세찬이는 엎어진 채로 움찔거렸다. 관장님은 그러고도 분을 주체하지 못해 다시 세찬이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그만하세요! 말로 하심 되잖아요.”

지후 시후가 세찬이와 관장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지후가 세찬이를 감싸고 시후가 관장님의 손을 억지로 떼어 냈다. 하지만 후후 쌍둥이가 말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른의 힘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름이는 어쩔 줄 몰라 하다 사범님을 불러오려는 건지 밖으로 달려갔다. 이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순간 세찬이가 넘어지면서 떨어트린 핸드폰이 보였다. 이나는 얼른 그걸 주워들었다. 그리고 동영상 모드를 켰다. 엎드려 있는 세찬이와 말리는 지후, 시후,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의 관장님까지 한 화면에 들어왔다.

“그만! 그만하세요. 저 이거 찍고 있어요. 계속 그러시면 바로 신고할 거예요.”

간신히 말을 내뱉는 이나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핸드폰을 쥔 손에도 땀이 고여 축축했다. 자꾸 손이 미끄러질 것 같아 온몸에 힘을 바짝 줬다. 관장님이 당장이라도 방향을 틀어 핸드폰을 낚아채 던져 버릴 것 같았다. 이나의 말이 들렸는지 관장님이 몸을 돌렸다. 핸드폰 화면에 당황한 관장님의 표정이 그대로 담겼다. 

“뭐, 너,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관장님이 말까지 더듬으며 이나 쪽으로 성큼 다가섰다. 겁을 먹은 이나는 곧장 두어 걸음 물러났다.

“오지 마세요. 거기서 얘기하세요.”

“얼른 그것부터 안 꺼? 이것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뭐 하는 짓이야? 잘못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하지. 시합에 집중하라니까 헛짓거리나 하고 다니면서 도장 망신 다 시키고.”

“아까 세찬이가 잘못한 건 맞아요. 근데 지금 관장님도 잘하고 계시진 않아요. 이게 벌이에요? 윽박지르고 소리 지르고 때리는 게?”

이나는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되물었다. 벌이란 건 다시는 같은 잘못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주는 것이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처벌하고 나면 과연 세찬이가 반성할까?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할까? 그럴 리가 없었다. 오늘의 공포만이 오롯이 새겨졌을 것이다. 억울함, 분노, 창피함 같은 것들만 남겨질 게 분명했다. 

“관장님이 세찬이를 막 대하니까, 세찬이도 남들을 막 대하는 거예요. 그렇게 배웠으니까.”

이나는 내내 목구멍에 걸려 있던 말을 겨우 내뱉었다. ‘존중.’ 그것은 어릴 때부터 고모가 항상 이나에게 말해 왔던 단어였다. 존중하지 않으면 존중받을 수 없어. 누구도 함부로 대해선 안 돼. 이나는 그 말들을 기억했다. 그 말들을, 관장님도 이해했으면 했다. 하지만 어떤 말도 관장님 귀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관장님은 들을 생각도 없는지 대꾸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와 이나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으려 했다. 

 “이게 또 무슨 짓입니까?”

 차량 운행을 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온 사범님이 새파랗게 질려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곧장 이나 앞을 가로막았다.

“제 조카한테 손끝도 대지 마세요.”

관장님을 쏘아보며 이나를 한쪽으로 비켜 세운 사범님은 이번엔 세찬이에게 다가갔다. 좀처럼 일어서지 못하는 세찬이를 조심해서 일으켜 세우고 어디 다친 데가 없는지부터 살폈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세찬이는 여기저기를 살피는 사범님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곤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관장님을 노려보더니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시후도 지후도 차마 그 뒤를 따라가지 못하고 달려 나가는 세찬이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지세찬, 거기 서. 지세찬!”

관장님이 세찬이의 이름을 여러 번 불렀지만 세찬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절뚝거리는 뒷모습이 멀어졌다. 

“막 쫓아가면 사고 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시간을 좀 주세요. 그리고 꼭 찾아서 사과하세요. 오늘 일, 정말 잘못하신 겁니다.”

사범님은 냉랭하게 말하고 이나를 챙겼다. 관장님은 무슨 말을 더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단단한 입매가 고집스러워 보였다. 

“고모, 세찬이 핸드폰 나한테 있어. 어디 갈 데도 없을 텐데…….”

이나가 자기 손에 들린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그때 관장님이 이나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홱 뺏어 들었다. 

“그만들 가 봐. 세찬이는 내가 알아서 찾아볼 테니까.”

몰풍스러운 관장님의 말에 애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갔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무작정 찾아보겠다니. 알아서 하겠다는 관장님의 말이 미덥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던 지후랑 시후는 세찬이를 찾아보려는 듯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다른 애들 보내야 하니까 우선 전 가보겠습니다. 4부 수업은 취소해야겠네요. 연락 돌릴게요.”

사범님이 이나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 옆에서 단단히 받쳐 주는 고모 덕분에 차갑게 식은 손끝에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이나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셨다 천천히 뱉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세찬이 편을 들어주고 싶진 않았지만 아까 봤던 세찬이의 표정이 자꾸 떠올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걔도 자기가 무슨 짓 한 건지 정돈 알 거예요. 근데요, 관장님,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숨 쉴 틈은 있어야죠. 숨은 쉬어야 반성을 하든 뭘 하든 하죠.”

“……핑계는 댈수록 늘어나는 거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시킨 거 열심히 하고 이상한 짓거리 안 했어 봐!”

관장님은 완고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일순 흔들린 표정을 이나는 놓치지 않았다. 도장에서 비상식적인 일을 벌인 데에 눈이 뒤집혀 날뛰긴 했지만, 관장님이라고 속이 편할 리 없었다. 이나는 더 말하는 대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일단은 세찬이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관장님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바로 돌아섰다. 관장님과 사범님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각자 갈 길을 갔다. 애들이 다 빠져나간 도장은 휑했다. 이나는 머뭇거리다가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마침 옷을 갈아입은 서하가 진아 언니랑 같이 나오고 있었다. 

“와, 진짜. 지세찬 별짓을 다 한다. 아니 얜 사과 안 하고 어디 갔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서하가 가만 안 두겠다는 듯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말했다. 이나는 금방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전해 주었다. 진아 언니가 맙소사, 하며 이마를 짚었다. 

“못 산다, 못 살아. 가만있는 사람한테는 시비도 잘 걸면서 자기 아빠한텐 찍소리도 못하냐.”

꼴 같지 않은 행동을 직접 당한 서하는 꼴좋다는 듯 빈정거렸다. 하지만 마음은 찝찝한지 말과는 다르게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별일 없겠지?”

“뭔 일 있겠냐. 지후 시후도 쫓아갔고 관장님도 찾으러 갔다며. 서하 너는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오늘 가서 푹 쉬어. 아까 대처 멋있었어.”

진아 언니가 엄지를 척 치켜올리며 서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 저기 름이 온다. 구름! 오늘은 네가 책임지고 서하 기분 풀어 줘. 눈치 빠른 우리는 쏙 빠져 줄 테니까.”

진아 언니가 씩 웃으며 름이와 서하를 딱 붙였다. 언니의 능청에 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 모습에 이나도 긴장이 풀려 피식 웃었다. 이런 와중에도 진아 언니의 너스레에 웃을 수 있다는 게 새삼 고마웠다.

“먼저 가. 나도 한번 가서 찾아봐야겠다. 아까 세게 찼는데…… 관장님이 또 패대기쳐서. 허리 괜찮을까 모르겠네.”

이나는 뒷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리곤 세찬이를 찾아 나섰다. 속에서부터 열이 올라와 냅다 돌려차기로 날려 버리긴 했지만, 위태롭게 비틀거리던 뒷모습을 떠올리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세찬이 찾았어?

먼저 따라나섰던 후후 쌍둥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직. 삼거리 골목길 쪽 돌고 있어.

길이 엇갈렸는지 아직 찾지 못했다는 문자가 왔다. 이나는 갈림길에 서서 고심하다 반대쪽 오르막길로 내달렸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샛길이었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골목길을 다 지나면 까마득히 높은 곳에 뜬금없이 탁 트인 공원이 나왔다. 그 공원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읍내는 작고 환해서 한참 보고 있으면 마음이 느슨해졌다. 언젠가 거기서 세찬이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이었을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일 때문에 그곳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던 날, 그 길의 끝에서 세찬이를 만났다. 

“너도 도망가고 싶어서 왔냐?”

이나가 무심코 물은 말에 세찬이는 “뭐래.” 하고 코웃음을 쳤지만, 그 뒤로 한참 말이 없었다. 꾸역꾸역 이 길을 올라야만 했던 이유가 세찬이에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나는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쯤 시야가 확 넓어졌다. 녹슨 운동 기구들이 늘어선 잔디밭을 가로질러 커다란 이팝나무가 서 있는 데까지 한달음에 뛰어갔다. 정자에 올라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세찬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나는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었다. 

“아, 진짜. 어디 간 거야?”

열이 오르는 이마를 문지르며 이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허리를 다친 애가 여기까지 올라왔을 리가 있나, 하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럼 또 어딜 가서 찾아야 하나 생각하니 막막했다. 휙 돌아서려는데 저만치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낮은 돌담길로 이어진 산책로 뒤편이었다. 혹시 싶어 기웃거리며 다가가자 쭈그려 앉아 있는 세찬이가 보였다. 세찬이는 벽에다 쿵, 쿵, 제 머리를 찧고 있었다.

“야! 뭐 하냐? 그만해.”

 기겁한 이나가 불쑥 손을 뻗자 놀란 세찬이가 뒤로 풀썩 주저앉았다. 저도 모르게 끙 신음을 내며 허리를 짚는 게 보였다.

“괜찮아? 아니 괜찮을 리가 있나. 일어날 수 있겠어?”

놀란 이나가 안절부절못하며 서성거렸다. 세찬이는 이나가 내민 손을 확 쳐내며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여기까진 왜 왔어? 또 발차기로 한 방 먹이려고?”

세찬이가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공격적으로 물었다. 힘없이 나가떨어진 게 꽤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겨루기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이나는 두 손을 앞으로 뻗으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싸우려고 찾아다닌 거 아니야. 걱정돼서 찾아다닌 거지.”

“그걸 믿으라고?”

세찬이는 전혀 들을 생각이 없는지 한쪽 입꼬리만 비죽 올리며 빈정거렸다. 

“네가 이상한 짓만 안 했어도 그렇게까진 안 했을 거야. 너도 알잖아.”

이나는 흥분하지 않고 좋게 얘기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서하를 놀리려 카메라를 들이대던 모습이 떠오르자 울컥 화가 또 치밀었다. 쏘아붙이고 싶은 걸 꾹 참고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화풀이도 적당히 해야지. 그건 네가 진짜 잘못한 거잖아.”

자기 잘못을 알긴 아는지 이번엔 세찬이도 말이 없었다. 그러다 씨근덕거리며 짧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맞을 짓을 했다 이거지?”

이번엔 이나가 할 말을 잃고 조용해졌다. 관장님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쟁쟁 울린 탓이었다. 

“시킨 거 열심히 하고 이상한 짓거리 안 했어 봐!”

그 말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찬이는 관장님이 때린 거나 이나가 발차기로 날린 거나 똑같다고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래. 때린 건 나도 잘못했어. 미안하다. 일단 내려가서 병원 갔다 와. 관장님도 너 찾더라.”

이나가 빠르게 인정하고 사과를 하자 세찬이의 표정은 도리어 굳어졌다. 관장님 얘기까지 나오자 숨을 꾹 참듯 얼굴이 엉망으로 붉어졌다. 

“신경 꺼. 상관하지 말라고.”

고집스럽게 움직이지 않는 세찬이를 보며 이나는 마른세수를 한 번 했다.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어쩐지 벽과 얘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 시합 나갈 거라며. 그럼 어쨌든 몸 관리해야 할 거 아냐.”

“네가 뭘 알아? 시합 나가기만 하면 금메달 따면서!”

 시합 얘기가 나오자 세찬이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달래 보려 꺼낸 패들이 다 꽝이었다. 

“그건…… 뭐 내가 워낙 잘하니까.”

스스로 말하고도 객쩍었는지 이나가 콧등을 긁적이며 얼버무리자 세찬이의 눈썹이 위로 휙 올라갔다. 

“연습 안 한다고 혼날 일도 없겠지.”

“알아서 연습을 하니까?”

“메달 못 땄다고 맞아 본 적도 없겠지.”

“관장님이 너 때려?”

이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됐어. 사범님은 무조건 네 편이잖아. 뭘 하든. 네가 불쌍하니까 잘해 주기만 하잖아! 불쌍하다고 다 봐주잖아!”

와르르 말을 뱉던 세찬이가 아차 싶었는지 꾹 입을 다물었다. 이나는 순간 멍해져 할 말을 잃었다. 불시에 정권으로 급소를 맞은 것처럼 명치가 욱신거렸다. 

“쯧쯧. 어쩌다 혹을 달고…….”

“멀쩡히 부모가 살아 있는데 고모가 애를 떠맡는 게 말이 돼?”

“죽어라 키워 봤자 남의 애지.”

저절로 귓가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들에 이나는 숨이 가빠지는 걸 느끼며 억지로 등을 당겨 폈다. 가슴뼈 아래 중앙의 오목하게 들어간 곳. 평소에는 판판하게만 느껴졌던 그곳이 옴폭 팬 것처럼 아렸다. 동네 사람들이 대놓고 수군거릴 때, 멋대로 떠들어댈 때, 이나는 항상 어깨를 잔뜩 굽히고 고모 뒤로 숨었다. 몸을 동그랗게 말면 아주 조그매져 사람들 눈에 안 띌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이나를 발견해 냈다. 

“쟤가 걔야.”

그 사람들은 까딱이는 고갯짓만으로도 이나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짧은 몇 마디의 말, 찌푸려진 미간, 설핏 올라간 입술 같은 것들이 이나를 짓눌렀다. 그럴 때면 목이 꽉 조이고 숨이 밭아졌다. 고모는 그때마다 이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곤 성큼성큼 걸어가 말 많은 사람들을 쏘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거기까지만 하세요. 그만하시라고요.”

고모가 이나를 가슴께보다 높이 들었기 때문에 이나는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벌렸던 입이 슬그머니 다물어지는 모습, 민망해하며 얼굴을 쓸어내리는 모습, 황급히 딴청을 피우는 모습…….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떠올랐다. 뭔가 대꾸 해 보려 했지만 누가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미안.”

그때 세찬이가 팔등으로 제 이마를 다시 퍽 치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는 말소리보다 팔등으로 이마를 때리는 소리가 더 컸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이나가 다시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때리긴 왜 자꾸 때리는데?”

“아니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런 거밖에 없으니까.”

뒷말을 웅얼거리며 세찬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보이지 않는 뭔가가 거기 있는 것처럼 말없이 바닥만 내려다봤다. 바닥의 그림자가 꾸역꾸역 기어 올라와 멱살을 잡아당기는 것 같은 그 느낌. 이나도 그 느낌을 알았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목 뒤가 뻐근해질 때까지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던 때가 이나에게도 있었다.  

“……뭐래. 태권도 정신이나 한 다섯 번 외치고 정신 차려.”

이나는 발끝으로 가볍게 흙을 파헤치며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이깟 바닥만 뚫어져라 봤던 날들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이나는 그러고 싶어서 발차기를 하고 주먹을 지르고 수없이 태권도 정신을 외웠다. 어떤 말들을 하기 위해선 언제나, 언제나 용기가 필요했으니까. 

“예의, 염치, 인내, 극기, 백절불굴! 어이!”

이나가 뜬금없이 태권도 정신을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자 이번엔 세찬이가 황당하다는 듯 쳐다봤다. 이나는 고개를 똑바로 치켜들었다. 불시에 정권으로 급소를 맞았다고 그대로 넘어져 있을 순 없었다. 벌떡 일어나 다시 맞서야 했다. 그게 이나가 고모에게 배운 삶의 태도였다. 이나는 뚜벅뚜벅 세찬이 바로 코앞까지 걸어갔다. 이제 세찬이는 바닥을 보고 있지 않고 이나를 보고 있었다. 이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야, 우리 고모 불쌍해서 나한테 잘해 주는 거 아니야. 가족이라 잘해 주는 거야. 소중하니까 잘해 주는 거라고.”

명치끝에 뭉툭하게 걸려 있던 그 말을 꺼내 놓자 이나는 속이 후련해졌다. 반대로, 세찬이의 얼굴은 멍해졌다. 공격만 하다 비어 버린 틈으로 내려찍기를 당했을 때처럼. 

“소중하니까, 잘해 준다고…….”

뻣뻣하게 굳은 채로 세찬이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


그날, 이나네 고모는 밤늦게 들어왔다. 피로하고 지친 모습이었다. 

“어휴, 참. 어쩌려고 그러는지. 엇나갈까 봐 잡는다는데 그게 핑계나 되니? 예전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아이가 언제까지 아이로만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고모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7년 동안 도장에서 함께 일하긴 했지만, 보통 둘이 엇갈려 가며 지도를 하기 때문에 사범님과 관장님이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동안 관장님의 태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걸 후회하는 눈치였다. 

“고모, 있잖아. 나 도장 그만두고 싶어. 더는 못 다니겠어.”

이나는 내내 생각했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도장에 다녔던 이나였다. 도장을 그만둔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기분으로, 이런 마음으로 계속 다닐 수도 없었다. 

“그래. 이번 시합 마무리되면 다시 얘기해 보자.”

“근데 나 그만두면 고모는 어떡해? 관장님이 가만 계실까?”

“이번에도 마음만 접수! 어른들 일은 어른들 몫으로 놔둬 줘. 그런 걱정까지 하게 하면 미안하니까. 알겠지?”

고모는 싱긋 웃으며 이나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나는 식탁 의자에 앉은 채로 허리를 축 늘어트렸다. 종일 긴장한 채로 있었더니 온몸이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았다. 세찬이는, 집에 잘 들어갔을까? 또 혼나고 있진 않을까? 관장님이 때리는 건 아니겠지? 갖가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세찬이의 행동을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가, 어디에도 기대지 못하고 겉도는 걸 보면 또 마음이 짠했다가, 하여간 복잡했다. 이단 발차기를 할 때처럼 정확하고 절도 있게, 딱딱 끊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나는 스르르 식탁에 엎드렸다. 볼에 닿는 대리석의 감촉이 차디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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