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빛 Mar 05. 2023

10. 몰카

10. 몰카


이나는 재빨리 서하 옆으로 바짝 붙어 섰다. 흰 도복에 묻은 생리혈을 가려 주려는 것이었다. 얼른 화장실로 데려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엔 사범님이 칸칸마다 넣어 놓은 생리대가 있었다. 사물함에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와야겠다 싶어 진아 언니를 부르려는데, 어디선가 찰칵, 셔터 음이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세찬이가 눈에 들어왔다. 서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나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야, 지세찬! 너 그거 당장 안 지워?”

이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돌려차기로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서하의 뒤에 붙어 서 있어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재밌는 구경거리 생겼는데 나만 볼 순 없지. 너네도 나 혼나는 꼴 열심히 봤잖아.”

세찬이가 일그러진 얼굴로 킬킬거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혼난 것에 대한 엉뚱한 분풀이 같았다.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지우라고!”

이나 대신 달려든 건 름이었다. 언제나 온화하던 름이의 표정이 험악했다. 름이는 핸드폰을 뺏으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키도 더 크고 힘도 센 세찬이가 쉽게 뺏길 리 없었다. 겨루기 스텝을 밟듯 이리저리 빠져나갔다. 

“쪼끄만 게 정색도 할 줄 아네?”

세찬이가 입으로만 빙글빙글 웃으며 카메라를 동영상 모드로 바꿨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정도란 게 있는 거야. 그만해, 지세찬.”

이번엔 시후가 세찬이의 손목을 잡으며 경고했다. 하지만 세찬이는 그대로 손목을 비틀어 빼며 시후를 밀쳐 버렸다.

“배신자. 넌 꺼져.”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한 시후를 지후가 간신히 붙들었다. 도를 넘은 세찬이의 행동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기린, 너 좀 창피하겠다? 걱정 마. 까불지만 않으면 이 사진은 공개 안 할 테니까.”

분위기가 엉망진창이 되든 말든 세찬이는 사진첩 넘겨 보는 시늉을 하며 약을 올렸다. 하지만 서하는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서하는 세찬이의 놀림이 심해질수록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생리 좀 묻은 게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 네가 하는 짓이 창피하지.”

서하는 한심하다는 듯 대꾸했다. 서하가 당장 지우라고 화를 내거나 울음을 터트릴 줄 알았는지, 생각보다 덤덤한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건 세찬이었다. 

“야, 그렇게 나오면 내가 이거 지워 줄 것 같아?”

“지우지 마. 증거 영상 잘 간직해 놔야지. 너 몰카범인 거 교무실 가서 다 얘기할 거야. 아, 멀리 갈 것도 없네. 안에 관장님이랑 사범님도 아직 있잖아. 혼날 일을 알아서 만드는구나?”

바지에 묻은 피가 보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서하는 세찬이의 코앞까지 바짝 다가갔다. 그러곤 또박또박 말했다.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 건지 이번엔 세찬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는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모두가 증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몰, 몰카범이라니! 내가 언제 몰래 찍었냐?”

“아. 대놓고 찍었지? 그래서 당당해? 네가 너무 잘한 일을 한 것 같아? 자랑스러워?”

서하가 몰아치며 말하자 세찬이는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세찬이에게 쏠려 있었다. 

“참 나.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정색하기는. 지운다, 지워. 더러운 사진 나도 안 갖고 있고 싶거든?”

“야!”

끝까지 빈정거리는 세찬이를 보며 이나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대로 달려가 발돋움을 해 공중 뒤돌려차기로 세찬이를 후려갈겼다. 힘이 실린 이나의 발차기를 정통으로 맞은 세찬이가 저만치 날아갔다. 다들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보호 장구도 없이 훈련된 이나의 발차기를 제대로 맞은 세찬이는 엎어진 채로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지세찬. 넌 오늘 일을 두고두고 후회할 거야.”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세찬이를 냉정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이나가 말했다. 서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진아 언니랑 같이 화장실로 가 버렸다. 누구도 쉽사리 끼어들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세찬이가 미적거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허리 때문인지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때 지후가 세찬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찬이는 머뭇거리다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지후는 세찬이가 중심을 잡자마자 손을 뺐다. 그리고 세찬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야, 내가 왜 네 옆에 있었는지 알아?”

“…….”

“우리 아빠 사업 망해서 집 나갔을 때, 네가 나랑 시후 대신 울어 준 거, 그게 너무 고마워서야.”

지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네가 아무리 멋대로 굴어도, 원래 내가 알던 지세찬은 그런 애가 아니니까. 그냥 참았던 거라고.”

 늘 까불거리고 장난스럽기만 했던 지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동안 지후가 왜 세찬이와 거리를 두지 못했는지 이해가 됐다. 

2년 전, 후후 쌍둥이네 집안일로 동네가 발칵 뒤집혔던 적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가며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던 지후 시후 아빠가, 사기를 당해 그동안 모아 온 돈을 몽땅 날려 버린 것이었다. 좁은 동네라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곧 돌려준다는 말에 많고 적은 돈을 빌려줬던 사람들 모두가 발을 동동 굴렀다. 당장에 후후네로 달려가 난리를 쳤다. 그런 일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후후네 아빠는 그 길로 집을 나가 이 주 정도 연락이 끊겼었다. 고작 아홉 살이었던 시후 지후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갔다. 후후네 아빠는 곧 다시 돌아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어떻게든 돈을 갚아 나가겠다며 사죄를 했다. 다행히 그 뒤로 일이 잘 풀려 지금은 거의 해결이 되었지만, 그때의 기억이 쉽게 잊힐 리 없었다. 

“후후, 너희 아빠 돈 들고 날랐다며? 완전 먹튀네 먹튀. 너넨 너희 아빠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당시 남의 약점 들추기 좋아하는 몇몇 애들은 무리를 지어 후후 쌍둥이를 놀렸다. 그때 나서서 후후 쌍둥이 편을 들어준 게 세찬이었다. 

“내 친구들 건들지 마!”

지후 시후 앞을 가로막고 그렇게 외치던 세찬이를 이나도 기억했다. 간절히 누군가 필요했을 때 그 애들의 곁을 지켰던 게 세찬이었다.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그날의 기억만큼은 지후 안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겠지. 그러나 지금 한 행동은 그런 기억들을 지워 버릴 만큼 창피한 짓이라는 걸, 지후는 말해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계속 그렇게 굴다간 네 옆에 아무도 안 남아. 네가 진짜 원하는 게 그런 거야?”

지후가 물었다. 세찬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표정에는 온갖 가지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그때 관장님이 상담실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다들 모여서 뭐 해?”

얘기가 어떻게 된 건지 관장님 얼굴이 벌겠다. 

“오늘 3부 수업은 여기까지만 한다. 주말에 보충 진행할 거니까 필요하면 와서 듣도록. 차 타고 가는 애들 순서 지켜서 나가고. 지세찬! 뭐 하고 있어?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움직여.”

관장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애들을 휘어잡았다. 그때 1학년 중 한 명이 쪼르르 달려가 좀 전에 있었던 일들을 일러바쳤다. 

“관장님. 세찬이 형이요…….”

안 그래도 열이 홧홧하게 올라 있던 관장님의 얼굴이 이제는 터질 것처럼 새빨개졌다. 

이전 09화 9. 관장님의 고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