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글자 에세이쓰기 21
겨울 아침 하늘이 흐려지더니 눈이 펑펑 쏟아진다. 아직 초겨울인데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린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게발선인장과 시클라멘이 을씨년스러운 겨울, 베란다를 환하게 밝혀준다. 눈 내리는 풍경과는 다른 아름다움이다. 문득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싶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장식했던 트리가 아직 창고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내 포기한다. 먼지 쌓인 물건들을 뒤집는 일이 번거롭다. 대신 조명등을 밝혀보기로 한다.
기분 전환은 대단한 무엇이 아니어도 된다. 맛있는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할 때가 있다. 작은 말 한마디로도 가능하고, 맛있는 빵 한 덩이면 된다. 나는 햇볕 아래 걸을 때 가장 평안한 기분을 느낀다. 오늘은 불가능해졌다. 대신 거실에서도 꽃이 잘 보이도록 베란다 화분의 배치를 바꾸었다. 덕분에 며칠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몸이 편안해진다.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것들은 기분을 바꾸어 놓는다.
나는 힘들고 지칠 때 동굴을 찾는다. 출근하던 차의 방향을 돌려 단풍 흐드러진 남이섬에 갔던 때가 있다. 골머리를 썩이는 업무에서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하루의 일탈은 그 일을 무리 없이 이끌어 가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집안일로 받는 스트레스가 도를 넘었을 땐 2박3일 혼자 여행을 갔다. TV도 와이파이도 되지 않는 산속이었다. 고요한 밤을 방해하는 냉장고 소음마저 죽여버리고 완전한 고독 속으로 들어갔다.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변한 것은 없었으나 나는 단단해졌다.
내 삶의 원동력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치는 것은 삶이 아니다. 나 자신이다. 나를 회복시키는 것이 지친 삶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때로는 가족도 삶이 된다. 나를 회복하기 위해 나는 혼자가 된다. 낯선 관광지에서, 고요한 산속에서. 지친 마음을 쉬게 한다. 누군가의 위로나, 선물이나, 곁에 있는 것들이 잠깐 마음에 위안을 주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힘을 얻고, 새로운 삶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것은 결국 내가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다. 나 자신의 동굴 속에서 충분한 쉼을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