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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딩 피플 Nov 12. 2018

찌질한 나에게 소설책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김연수


책은 비상구였다. 산더미 같이 쌓인 일을 미루고 소설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이 되어서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고민을 접어두고는 했다. 하지만 동아리를 시작하면서 상황은 조금 변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아 저는,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책을 읽어요…’라는 멘트를 던지기엔 너무 없어 보였다. 나를 포장할 멘트를 만들어야 했다. 괜찮은 멘트를 고민하던 중, 이왕이면 좋아하는 작품도 하나쯤 있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제일 유명하다고 여기던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찌질하게 나는 김연수와 만나게 되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내게 이상문학상의 작품들을 이해할 능력은 없다. 하지만 수상작을 펼친 중요한 이유(?)때문에, 김연수를 이해하기 위해 꽤나 많은 글을 읽었다. 처음에는 소설, 이후에는 점점 호흡이 짧고 읽기 편한 산문집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운 좋게도 산문집은 그의 가치관들이 아무런 포장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덕분에 내게도 진짜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다.


사람은 인생을 여러 번 산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떠올리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외국으로 파이가 이민을 가던 길에 폭풍우를 만나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고 몇 개월 동안 동안 구명보트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연배우의 연기나 영상미도 일품이지만 가장 압권은 파이가 보험사 직원들과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그 대화에서 이전과는 다른 인생을 살게 될 파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직접 보는 걸 추천한다) 우리도 배가 침몰하는 것처럼 큼지막한 일은 아니어도 세상 보는 눈이 달리는 일을 겪게 되는데, 좀 더 멋지게 말하면 불타는 다리를 건너서 다시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 물론 내가 한 말은 아니고 김연수 씨가 여러 산문집에서 한 말이다. 이건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포인트이자 그의 인생을 담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김연수는 94년 작가세계문학상을 받으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꾿빠이, 이상’을 발표하고 나서야 그가 진짜 소설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 ‘꾿빠이, 이상’은 등단은 했지만 잡지사에서 일하던 김연수가 자신이 건너왔던 불타는 다리를 돌아보며 얻은 깨달음이 담긴 소설이기 때문에, 또 이후의 작품들도 그 깨달음이 밑바탕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당연하게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의 주인공 카밀라도 불타는 다리를 건넌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라는 소개글을 보고 혹시 그녀의 사랑이 너무 뜨거워서 다리가 불에 탄 건가 싶을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뜨거운 사랑 얘기는 아니고 태어나자마자 미국으로 입양된 주인공이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친모를 찾는 이야기다.


책 곳곳에는 불타는 다리에 대한 김연수의 통찰이 아주 잘 담겨있다. 우선, 인생이 이전과는 달라질 전환점이 언제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카밀라도 재혼한 양아버지가 보낸 어린 시절의 물건이 담긴 6개의 상자들이 자기 인생을 바꿀지는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자를 열면서 그녀는 한국에 오게 되고, 자신의 모국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마주한다. 자신의 엄마는 17살의 나이에 아이를 낳은 미혼모였고 어쩌면 아빠는 엄마와 남매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것.


다른 통찰은 어떤 식으로 인생의 변환점이 왔는지 보다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나에게 생긴 변화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도 카밀라에게 생긴 변화를 세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친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아가면서 혼란스러워하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게 된다. 비록 카밀라가 변하게 된 이유는 가슴 아프지만 그로 인한 변화는 충분히 긍정적이었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김연수가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말하는 소설이 갖는 역할에 대한 이야기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엔 큰 절벽이 있어서 서로의 진심이 통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어떤 도구를 통한다면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소설이 진심을 전해줄 도구가 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계속 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는 김연수를 만나서 불타는 다리를 건넌 것 같다. 또 운 좋게 소설에서 그의 진심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같은 책을 읽고 나처럼 그의 진심을 느끼거나 그의 작품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짧은 글로 다른 사람들도 김연수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알 수 기회를 가진다면 좋겠다.



서평 <리딩피플/김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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