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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리아 May 15. 2023

개소리

- 할머니가 끄는 유모차에 개가 앉아 있었다

오늘의 일기는 개소리에 관한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어느덧 3년이 되고 있는데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의 이웃의 개는 내 얼굴을 익힐 법도 되었을 텐데 만날 때마다 앙칼지게 짖어대며 나를 꿀리게 하려는 건… 왜 인지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개소리를 내는 앙칼진 녀석의 이름은 사랑이다. 다른 이웃 할머니들에겐  꼬리를 흔들어대고 씰룩씰룩 웃는 귀를 보았다. 말티즈 같은데 날 볼 때마다 사납게 짖어대는 걸 보고 처음엔 미친개인가 싶었다.

( 사실, 아이들처럼 개들도 예쁜 사람을 좋아하는 본능이 있기에 보통 개가 저렇게 날 보고 짖어댄 적이 없어서 미친개로 생각 아니 공상하기로 하였다. ㅎ ㅎ)


짖을 때마다 쫄보처럼 깸짝 놀라 움츠러들면서도 속으로는 “이 개 미친 나…”라고 하기도.

물론 개가 안 들리게.


그 개는 사랑이인데 주인이 항상 유모차에 개를 다정히 앉히고 산책을 한다. 유모차에 앉힐 때 개의 표정을 보면 그 순간을 좋아하는 것 같다. 주인에게 존중받는 느낌을 느꼈던 걸까. 그때는 개의 볼에 홍홍 꽃물이 들고, 혓바닥은 “대만족”이라고 낼름 말하며 상긋 웃는 것 같기도.


사실 개를 정중히 모시는 주인은 할머니이기에 반대로 주인을 안락한 유모차에 모시고 개가 슬슬 바퀴가 잘 굴러가는지 보면서 산책을 가야 할 것 같은데…

순간 환상동화처럼, 사랑이가 멋진 슈트를 입고 사람으로 변신해서 할머니를 유모차에 모시고 산책을 하는 상상을 했다. 그러다 내가 나타나면, 개소리를 내는데


그 말의 뜻은 : 어이, 못생긴 아줌마. 좀, 사뿐사뿐 다녀요. 우리 할머니 귀가 안 좋으시거든요.


그런 상상이 미치자, 다시 머리에 뭉게구름을 쏟고, 사랑이가 여자라면? 사랑스러운 나의 얼굴을 질투해서…


- 왜 우리 주인님보다 예쁘고 젊고 난리세요! 앙!

   우리 할머니는 질투가 많답니다. 젊음을 질투하지요.


푸하, 이런 상상도 해본다. 언젠가 개소리를 해석하는 챗GPT도 나오겠지? 한 번 물어봐 볼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개들은 털에서 반짝반짝 윤이 난다. 머리카락이 눈이 오는 날이 된 할머니는

자신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었어도, 개의 머리털은 다정히 빗어주겠지…. 정말 다정한 사랑이다.


오늘 아침 미사를 보러 나가는 길 엘리베이터에서 또 만났는데… 앙칼지게 한번 앙! 하고 짖더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나를 얕잡아 보는 건지, 자신이 내는 개소리로 선빵의 기선제압 훅을 날렸다고 생각하는지, (깜짝 놀라 움츠러든 어깨와, 나도 모르게 다소곳하게 기도하듯이 모아진 두 손을 본 것인지…)

어쨌든 아침잠이 다 달아나고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언젠가 친구가 내게 “넌 개 안 키우니?”라고 물은 적이 있다. 사실 나도 아기자기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는데, 책들이 즐비한 집을 상상하니… 개가 책을 뜯어먹을 것 같아서… 책이 아까운 게 아니라 개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아서… 고민 중에 있었다.


사실 오래전 얼룩이(아홉 살 때 우리 집에 온 강아지)와 헤어지고 난 후, 우리 집은 더 이상 강아지를 키우지 않는다. 가끔 내가 힘든 날이 있을 때 얼룩이가 꿈에 찾아온다. 마당을 같이 뛰면서 나는 풍선껌을 불고 얼룩이는 개껌을 불면서 함께 웃는다.

엄마가 심부름시킨 두부를 사 올 때도 얼룩이와 동행한다. 마치 호위무사처럼…

그때 얼룩이도 몹시 짖어댔는데… 사랑이처럼.

지난 삼월 아파트에 핀 목련이 사랑이 같았다.


이별이 아플 때, 사랑의 흉터라고 말할 수 있겠지. 사랑해서 마음을 온전히 내주었으니 흉터가 생긴 거라고. 사랑의 흉터는 사랑이 빨간약이다.

새살이 돋으면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고.


그러고 보니, 사랑이한테 난 개껌조차도 준 적이 없잖아. 그러니,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네!

뭘 바라냐.


개껌도 준 적이 없는데 사랑이가 날 보고 꼬리를 흔들어대고 상긋 웃어 줄 때, 주인이 손에 힘을 빼고 아기처럼 소중히 안아 유모차에 살포시 앉힐 때처럼 대만족 상태로 나를 마주할 날이 어쩌면 진짜 사랑이가 미친개가 된 날일지도.


유모차에 아기 대신 강아지가 앉아 있는 게

어릴 적엔 신기했으나 이제는 강아지라도 앉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 건…


외로움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내가 할머니를 해치지도 앉는데 앙칼지게 앙!

하고 한 번 훅을 날리는 사랑이는

무릎이 아픈 할머니가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든든하고 귀여운 사랑,

힘을 내게 만드는 존재.


할머니가 매일 자시는 뜨끈한 도가니 국물 보다

깊고 진득한 사랑

무릎을 벌떡 솟구치게 만드는 사랑 매직,


언젠가 유모차에 앉은 나의 개를 상상한다.

사실 요즘 나는 아기 수달과 고영희에 빠져 있다.

유튜브 랜선 이모인데, 정말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운 아기 동물을 유모차에 정중히 모시고 산책하는 할머니가 된 미래의 나를 상상한다. 그땐 나도 산책 나가기 전에,

날 지키거라, 하고 개껌과 추르를 주며 나의 사랑스러운 아기에게 개스라이팅을 할지도!


이 세상에는 사랑이 들어있는 풍경이 참 다채롭구나!

그래서 사랑을 발견하는 게 재밌다.

어디에 쏙 들어있는지?

(할머니 산발이 되어도 강아지 머리털은 뽀송뽀송 윤이 나는 것에도 사랑은 들어 있지.)


할머니와 개의 사랑.

생을 서로 반려하는 다정한 동무.



그리고

모든 사랑에는 소리가 있었다.



#개소리 #할머니 대신 유모차에 앉은 개 #사랑


 (2023. 5.15. am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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