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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Jul 18. 2024

닥쳐주세요, 맨스플레인

일본 드라마 <만들고 싶은 여자와 먹고 싶은 여자>

들어가기 앞서 이 시리즈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 요리하기를 좋아하는 노모토는 우연히 많은 양의 패스트푸드를 사 가는 이웃, 카스가를 마주친다. 평소 입이 짧아 아쉬움을 느끼던 노모토는 용기 내서 카스가에게 식사를 대접해 주고 싶다고 제안한다. 맛있게 먹는 카스가를 보며 노모토는 행복을 느끼고 이후 그들은 자주 함께 식사하게 된다. 이 시리즈는 두 사람이 함께 식사하며 점점 더 가까워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글에서는 각 에피소드 중, 맥주가 등장하는 시즌 1의 3화를 다뤄보고자 한다.

©티빙

닥쳐주세요, 맨스플레인

어느 날, 두 사람은 군만두를 같이 구워 먹기로 한다. 노모토는 군만두에 찰떡인 맥주도 준비해 두었지만, 카스가는 군만두 + 맥주 조합에 안 좋은 기억이 있다며 밥이랑만 먹는 편이라고 답한다. 무슨 일인고 하니...


카스가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카스가는 퇴근 후에 남자 손님들만 있는 교자집에서 군만두 3인분과 밥 곱빼기를 주문한다. 그러자 옆자리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아저씨가 대뜸 맨스플레인을 시전한다. "군만두에 밥이라니, 정말 이해가 안 된다. 군만두엔 맥주가 최고다!"라며 취향을 비난하더니, "만두 주문 방법도 틀렸다. 군만두는 1인분씩 주문해야 따뜻하게 먹을 수 있다."며 선 넘는 지적을 한다.


©티빙


아저씨의 맨스플레인을 무표정으로 듣고 있던 카스가는 아저씨의 말이 끝나자 비장한 표정으로 맥주 대용량 한 잔을 큰소리로 주문한다. 그리곤 보란 듯이 맥주를 원샷으로 비우곤 아저씨에게 "이제 됐습니까?"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아저씨는 당황하고 서둘러 짐을 챙겨 자리를 뜬다.  


카스가에겐 그 외에도 맨스플레인에 대응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1) "아ㅎ 네ㅎㅎ"하고 어색하게 웃어넘기기

2) 말로 반격하기


가장 중립적이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숨기는 1번이 가장 쉬운 선택지였을 거다. 갈등을 일으킬 여지가 없으니까. 또 바로 "그러시군요. 저는 이렇게 먹는 게 좋아요."처럼 조용히 반격하거나 "그쪽이 뭔데 상관하세요?"같이 말로 공격할 수도 있지만(2번), 카스가는 조용히 있다가 바로 주문했다. 왜 그랬을까?


여기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겪은 일이라는 점에 주목해 볼 만하다. 여성 사회초년생이 겪었을 상황들, 절로 떠오르지 않는가. 숨 쉬듯이 던지는 조언(의 탈을 쓴 잔소리), 네가 잘 몰라서 그런다는 깎아내림 등 젊은 여성에게만 유독 쉬운 무례함들. 이 무례함들에 위 2가지 방법별로 대응해 본다고 가정하고 예상 가능한 결과를 정리해 보자.


1) "아ㅎ 네ㅎㅎ"하고 어색하게 웃어 넘기기

  ㄴ 상대는 날 '만만한 애' '물렁한 애'로 인식하고, 계속해서 무례한 짓을 한다.

2) 말로 반격하기

  ㄴ 내가 아무리 논리적이어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하고 언성만 높아진다.

  ㄴ 상대는 요즘 애들은 되바라졌다며 동료/상사들에 툴툴대고, 내 평판이 아작난다.


경험적으로 두 가지 방법은 이 맨스플레인을 해치우는 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무표정으로, 말없이, 상대의 기를 꺾는 행동을 취하기로 선택한 게 아닐까. "이제 됐습니까?"라는 짧은 말에 "자, 네가 원하는 대로 했으니 이제 꺼져주겠니?"라는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정리하자면, 카스가는 자신의 취향을, 나아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맥주를 벌컥벌컥 원샷으로 마셨다.



나로 있어도 되는 시간

이런 안 좋은 기억으로 군만두에 맥주를 피하게 된 카스가가 노모토와의 식사 시간에는 맥주를 마신다. 카스가 입장에서 노모토는 이런 사람이다. 나와 군만두를 먹겠다고 불판을 사고, 내 이야기에 같이 분노하고, 내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나와의 식사 시간에 정말 행복해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군만두에 맥주를 맛있게 마시고 있다. 그와 함께 이 시간을 즐기기 위해 결심한 듯 맥주를 마시며 안 좋았던 경험을 씻어낸다.

©티빙


게다가 아저씨 앞에서는 내 취향을 힘 있게 말하지 않던 카스가가 노모토 앞에서는 자신의 취향을 명료하게 말한다.

- 저는 주로 군만두에 쌀밥을 먹어요.

- 저는 폰즈도 좋아해요.


카스가에게 노모토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줘도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참고로,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엔 이웃으로 시작해 친구, 연인으로 변화해 나간다(3화에서는 친구가 되어가고 있는 단계). 늘 표정도 없고 감정 표현도 별로 안 하던 카스가이지만, 이날 노모토와 군만두에 맥주를 먹고는 처음으로 웃는다. 처음 군만두에 맥주를 마셨을 때는 경계심과 분노로 가득 차 있던 카스가가 이제는 편안하게 자신을 꺼내 보이며 웃기까지 한다. 안 좋았던 경험을 덮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원샷으로 마셨던 그때와는 다르게 이 시간을 아껴 먹는 것처럼 조금씩 노모토를 바라보며 마신다.



어쩌다 술집에서 모르는 사람과 말을 섞게 될 때, 종종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지식과 고상한 취향을 뽐내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이 있다. 내 소중한 시간을 이들과의 대화(또는 강의)에 쓰기도 싫은데, 내 취향에 대한 지적까지 한다..? 나였다면 아마 말로 반격을 했을 거다. 그래도 5년 이상 사회생활 하면서 쌓은 수동 공격 스킬을 발휘하며 '나중에 글감으로 써먹어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글을 쓰는 내내 빨리 완성하고 군만두에 맥주 한잔을 해야겠다는 마음만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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