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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le Sep 15. 2022

몇 문장만으로도

「라면을 끓이며」, 김훈


라면을 끓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김훈 작가는 라면을 끓이면서 방대한 이야기 나래를 펼친다. 라면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속에 자신의 추억을 섞는다. 글감을 위해 라면의 국제시장 위상 대해서 알아보기도 한다. 나는 라면을 끓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만큼 평소에 나는 내 생각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하게 된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몇 가지 주제에 대해 글을 써보긴 했지만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글을 너무 쉽게 쓰고 있지는 않을까.


 지난 책 서평에서도 언급한 부분이지만 다시 한번 김훈 작가처럼 글을 쓰고 싶었다. 닮고 싶은 점이 더 많아졌다. 역시 그의 글에는 그의 삶과 취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글이 재밌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예를 들면 특히 김훈 작가의 맛 표현은 여러 감각을 일깨운다. 단순히 맛이라는 감각에 의지하지 않고 다른 감각과의 연결을 활용한다. 마치 내가 그 맛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김훈 작가 같은 사람이 오마카세를 하면 대성하지 않을까. 나는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의식하여 무색무취로 살고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목수들의 연장을 직접 다루며 세상과 연결된 것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육필에서 상대방을 생각하며 감동하는 그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다. 그 스스로도 본인이 아날로그적이라 언급하기도 한다. 연필로 글 쓰는 것을 고집하는 그를 보며 철학이 있음을 느낀다. 어떠한 관점에서는 고집일 수도 있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래서 재밌다. 또, 그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경건함을 느끼고 지루함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을 가지고 싶다.



글을 읽으면서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가끔 재밌는 영상을 볼 때면 혼자 깔깔대며 웃곤 한다. 너무 재밌어 다른 사람을 보여주면 시큰둥한 경우가 있다. 그 순간 '아, 내가 이런 웃음 성향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깨닫는다. 왜 안 웃기지? 나는 가끔 검색해서 다시 보고 또 웃는데 말이다. 어쨌든, 이런 경험을 이 책에서도 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나 재밌어한 주제를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읽는 순간마다 혼자서 끅끅대며 웃는 순간이 있었다. 내가 평소에 했던 생각이지만 입 밖으로 이야기하지 못했던 내용을 마주한 순간에 웃었으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신기해하며 웃었다.

        

 살아오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난다. 그중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며 대화를 하는 순간이 기대되는 사람이 있다. 흥미롭고 재밌는 존재라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는데, 내가 이 책을 볼 때도 그런 장면들이 있었다. 아마 김훈 작가를 만나서 대화를 한다면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싶다.

                 


몇 문장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나에게는 독서 노트가 있다. 거창한 노트는 아니지만 독서를 하다 기록하고 싶은 내용이 있을 때 가끔 간단하게 끄적인다. 독서할 때 말고도 글감이 떠오르면 적겠다고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지만, 번번이 어두운 가방 속에 박혀있는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하다. 하지만, 「라면을 끓이며」를 읽을 때는 꽤나 잘 활용했다. 김훈 작가의 에세이의 모든 문장이 좋지만, 그중에서도 곱씹게 되는 문장들이 있다. 그런 문장들을 읽을 때는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몇 번이고 몇 분이고 머물러있다. 그 상황을 떠올리거나 내 삶에 대입해본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출근하는 게, 주말이 끝나는 게 너무 아쉽고 힘들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읽고 나서는 체념 비슷한 마음이 생겨났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 밥을 먹으려면 밥벌이를 해야 한다. 출근을 마주하는 건 아무런 대책이 없다. 기어코 돌아온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내가 가지지 못해 그리워하고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사랑이라고 정의를 내려주었다. 이게 사랑이라고? 아닌 것 같으면서도 맞는 것도 같다.

          

"삶은 풍화이며 견딤이며 또 늙음이다. 살아서 무엇을 이룬다는 일도 그 늙음과 견딤 속에서만 가능하다. 삶은 그림보다 무겁고, 그림보다 절박하고, 그림보다 힘들다. 그리고 삶은 그림보다 초라하다. 그림보다 꾀죄죄하고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훼손되어 있는 것이 삶의 올바른 풍경이다."

 대개 드라마나 영화는 그림이며, 하물며 유튜브 영상과 같은 sns도 그림과 같다. 비루함이 없다. 비루한 것들은 보여지지 아니한다. 하지만 삶은 늙어만 가고 초라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게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 가치관에 정확히 들어맞는 문장이었다.

           

"나는 손의 힘으로 살아야 할 터인데, 손은 자꾸만 남의 손을 잡으려 한다."

 요즘 내가 나에게 느끼는 것이었다. 앞으로 계속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처럼 혼자 이뤄야 할 것들이 많은데, 자꾸 친구를 찾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게 된다.


"삶을 살아내는 자들은 삶을 설명하거나 추상화하지는 않는다."

 부모님이 생각나는 문장이었다. 부모님은 삶을 설명하거나 추상화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내셨다. 그 모습을 옆에서 항상 지켜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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