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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210818

by 지야 Feb 05. 2024


장대비가 쏟아졌다. 정전이라도 된 것인지 가로등이 일시에 꺼졌다. 너무 많은 비 때문에 차선이 보이지 않았다. 초행길의 렌터카, 운전을 하는 최군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앞만 보고 있었다. 카오디오에선 비가 많이 오니 조심하라는 교통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주에 오는 게 아니었다. 이 섬은 나를 여전히 거부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 그 섬은 나와 상성이 좋지 않은 곳이었다. 그 섬에 발 들이기 위해 10년 동안 비행기 예약은 세 번을 취소했고, 두 번의 결항도 겪었다. 계획 단계에서 어그러진 것도 여러 번. 그러다 마침내 제주 땅을 밟은 것은 2014년 봄이었다. 그 때라고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한 달 전부터 함께 예약하고 일정을 짰던 동행이 출발 일주일 전에 출근을 통보받았다. 이번 학기는 같이 팽팽 놀자고 굳게 약속했지만, 불러주는 자리를 마다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동행이었던 친구는 떠나버렸고, 프로계획러인 친구가 짜준 일정만 남았다.

면허가 없는 나는 친구가 짜준 일정을 택시와 버스로 꾸려 가야 했는데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취소 수수료가 발생하지 않는 7일 전이었다. 이번 여행도 이렇게 꽝이구나 할 때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최군. 이주일까지는 안되고 3박 4일 정도면 함께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프로계획러의 여행 계획은 기사회생하였다.

 

3월 중순의 제주는 추웠다. 기상 이변이라 했다. 벚꽃과 유채가 활짝 피었는데 기온은 영하였다. 봄 옷만 잔뜩 넣은 가방에서 꺼낼 수 있는 건 얇은 머플러 한 장이 다였다. 달달 떨면서 꽃구경을 했고, 숲 길을 걸었고, 바다를 봤다. 그러더니 3일째에는 비가 내린다. 한 여름 장마같이 시원하게. 어이없는 웃음만 났다.

보이지 않는 차선에 신경을 바짝 세우느라 날카로워지긴 했어도 최군은 짜증도 화도 내지 않았다. 끊임없이 투덜투덜 도로 사정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너 때문에’라든가 ‘니가’로 시작하는 말은 없었다. 모든 일정에서 다 그랬다. 입에 안 맞았던 메밀전병도, 요일을 잘못 골라가 들어갈 수 없었던 추사관도, 너무 많이 걸어서 기운 빠졌던 애월 어딘가의 동백꽃밭도, 자신은 절대 일정에 넣지 않았을 것이라던 미술관에서조차 ‘탓’ 하지 않았다. 기운 빠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거나 적당한 시점에 양질의 탄수화물들을 입에 넣어 주었다.

만날 때마다 진심인지 장난인지 모를 소리로 하던 “결혼하자.”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제야 허탈함을 일으키는 그의 농담도. 춤인지 몸짓인지 괴상하기만 하던 장난들도 관계를 유연하게 만드는 그의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기에 내가 할 수 없는 것 - 무거운 분위기를 풀거나, 싸움 뒤 화해의 실마리를 주거나 하는 것들- 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와의 일생은 답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빠, 하자. 결혼.”

여행 마지막 날 아침. 성산 일출봉 중턱 어디쯤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다가 말해버렸다. 꼭대기에서 일출 볼 것을 계획했지만 꼭대기에 도착하지 못한 채. 여전히 얇은 머플러 한 장 외에는 찬바람을 막아 줄 것도 없는 채. 꽃도 반지도 없는 프러포즈였다.

 

돌아오는 비행기가 강풍에 한나절이나 지연된 것은 제주가 미리 귀띔해 준 우리의 앞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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