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02
집으로 올라가는 길은 도착할 때까지 오르막이다. 인도 없는 이차선 도로를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야 한다. 어느 집에선가 풍기는 금목서 향이 곧 겨울이 올 것이라고 알려준다. 자정도 훌쩍 넘어버린 시간. 초등학교를 낀 주택가는 고요하다. 학교 앞 횡단보도의 신호등만 주황색 불빛을 깜박거리며 조심하라고 경고를 한다. 그 경고는 나를 향하는 것인가. 깜박이는 신호등 불빛 아래 표시판이 붉은 불빛으로 말한다.
서행.
멀리 뒤쪽에서부터 빈 도로를 힘껏 달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뛰어들면 죽을 수 있을까? 죽는다는 보장이 있다면 당장 뛰어들 수 있다. 죽지 않고 다리 하나나 손가락 세 개쯤 못쓰게 되면 그래서 장애인 등급이 나올 수 있다면 두 번도 뛰어 들 수 있다. 그런데 둘 다 아니면? 죽지도 못하고 숨만 붙어 있을 정도로 다쳐버리면? 나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이 되면? 그 생각에 발을 옮기지 못한다.
그럼에도 책 한 장 제대로 넘길 수 없는 날이 계속된다. 줄줄줄 외우고 쓰고를 몇 번이나 해도 모자랄 시간에 두꺼운 소설책을 읽는다. ‘해리포터’ 환상의 세계로 도망치고 있음을 안다. 과도한 불안으로 인한 회피. ‘과제의 중요도와 불안이 과하게 높은 경우, 과제수행보다는 과제회피의 경향을 보인다.’ 그저께 본 학습심리 부분에서 내 현재상태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상태까지 몰고 온 것은 지난 몇 년간 누적되어 온 학습된 무기력. 누적된 무기력은 학업을 포기하게 만든다는데, 아직까지도 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기인가, 집착인가, 아니면 관성인가.
꼬박 13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뭘 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굳이 자정이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식구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계단을 올라 조심스레 열쇠를 돌리면 물속 같이 잠잠한 집이다. 내 발자국 소리가 제일 큰 소리이다. 숨죽여 내 방 미닫이 문을 열고, 자리에 눕는다. 이대로 눈 뜨지 않으면 좋겠다. 땅 속으로 꺼져도 좋고, 하늘로 솟구쳐도 좋다. 이렇게 잠든 채로 아파트가 무너져도 좋을 것 같다. 동네 사람들 다 같이 길동무로 삼으니 소풍 같고 신나겠네.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국어교사협회 워크숍 차량 서른 대 전복사고. 이런 뉴스 헤드라인도 생각해 보고 학급 당 인원수 20명으로 감축. 이런 헤드라인도 생각해 본다. 이불 속에서 뒤척뒤척하는 사이에 아빠의 기척이 느껴진다. 벌써 4시인가 보다. 억지로 억지로 눈을 더 꼭 감는다.
귀는 깨어있는데 머리는 자고 있는 사이 출근하는 엄마와 등교하는 남동의 목소리가 들린다. 뭔가 걱정스런 당부들을 머리맡의 엄마가 하고 있는데 응 응 대답은 하지만 깨어나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눈을 뜬다. 씻고 점심 도시락 싸서 나가면 독서실 문 여는 시간에 대충 맞출 수 있겠다. 어제보다는 좀 더 나은 하루겠지. 기대하다가 더 나은 하루라 해봤자 책 두어 장 더 보는 정도인가 싶어서 한숨부터 나온다. 한숨을 내 쉰 목소리가 어색하다. 벌써 며칠째 목소리를 내 보지 않았다. 소리가 나긴 나는가 ‘아아’ 말해본다. 내 목소리를 들은 눈시울이 빨갛게 차오른다.
지금 나는 한 사람 몫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교원임용고사에 목을 매던 그 시절은 그렇게 길고 어두웠다. 관성처럼 하던 공부, 객관적 지표 없는 수험생활. 일인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불안감.
나의 20대를 침몰시켰지만, 학교에 나의 자리는 없다. 이제야 돌이켜보면 그 시절을 그렇게 보낸 것이 아깝다. 안타깝다. 겨우 일인분의 사람이 되고 보니,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으로든 일인분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