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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혀둔 책 읽기

211128

by 지야 Feb 16. 2024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작가 김영하는 TV쇼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 거예요.”


모든 장서가들의 요만큼의 죄책감을 씻은 듯이 날려준 말에 그에 대한 애정이 좀 더 샘솟았다. 우리집도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의 비율이 반반 정도다. 읽은 책은 계속 정리하고, 새로운 책은 계속 들어오니 곧 읽지 않은 책 비율이 읽은 책을 넘어서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럼에도 매일 매일 새 책은 나오고, 나는 출판계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미미한 사명으로 꼬박꼬박 새 책을 책장으로 보낸다.


책장 각 칸에 누워있는 책들이 한 권씩 보이기 시작하면 저들 중에 무엇이든 읽어치워야겠다는 압박감이 생긴다. 이 때 신중해야 한다. 무턱대고 아무 책이나 골랐다가 너무 재미없어서 한 권의 책도 못 치워버리거나, 너무 재미있어서 관련 책이 더 생기는 불행한 일이 생기고 만다. 다 읽고 나서,


“음.. 좋아, 그런데 소장은 안해도 될 것 같아.” 


하는 적당한 책을 고르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고르기는 실패다. 오래 묵은, 나의 숙원이라 할 수 있는 책을 골랐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이 책은 우리집 책장의 박힌 돌이다. 인터넷 서점 구매이력을 보면 2013년 11월에 구입을 했다. 친정집에서부터 세번의 이사를 나와 함께했다. 그 중간 중간 읽어 보려 시도는 했지만, 책상 위에서, 거실 바닥에서 뒹굴 뿐 좀처럼 책장을 넘기기 힘들었다. 


읽지 못한 이유야 어디 한 두 개이겠냐만은, 그 중 몇가지를 꼽자면, 책의 판형이 너무 크다. 읽는 이의 편의를 위해서 주석, 설명 등을 책 장 양 옆에 달아 두었는데 그러는 바람에 책이 정사각형 판형을 가지게 되었다. 한 손에 잡기 힘들었다. 그림 자료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서 정말 좋은 재질의 종이를 사용했는데, 덕분에 책이 너무 무거워졌다. 그러니 가방에 넣어 다닐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부실한 팔목에 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제일 큰 장벽은 그리스인들의 이름이었다. 


처음, 일본 소설을 읽을 때가 떠오른다.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 정도였는데, 한참을 읽는 동안 이 등장인물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일 난관은 역시 러시아 소설이었다. 러시아 소설의 주인공들은 일단 이름이 길다. 이름, 성, 가운데 아빠 이름도 들어가는데 딸이랑 아들이 다르다. 당연히 예외도 있고, 애칭도 있고, 약칭도 있고, 누구는 이름으로 부르고, 누구는 부칭으로 부르고, 이 사람들은 이름이 몇 개인지, 정말 그 때를 생각하면 시베리아의 나무들을 다 태워버리고 싶다.


그래서 그리스 이름쯤이야 했는데… 하아. 올리브 압착기에 넣어 쭉 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애들은 뭔 이름이 이리도 다 비슷한건지!!! 김지훈, 감지운. 뭐 이정도의 차이겠지만 낯설고 어색한 이름들이 개인의 특징 없이 어느 나라의 누구, 또 다른 나라의 누구 이래 버리니 나중엔 이게 이름인지, 지명인지, 이 나라가 저 나라 같고, 저 나라가 이 이름같고!!! 그래서, 잠시 멀리 둔 책이었다.


그리스 로마신화를 다 읽은 기념으로, ‘그래 이제는 읽을 수 있겠지. 그래도 한 번 들은 이름이랑, 두 번 들은 이름이 같겠어?’ 하며 다시 시작했다. 트로이 전쟁을 끝 낸 오디세우스의 귀향이야기인 이 몇 천 년 된 이야기는 지금이라면 시마과장 시리즈를 뛰어넘는 권수를 가진 소설이 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시마과장은 만화다) 서사시였으니 묘사, 설명 등이 부족해서 한 권의 책으로 묶였지만, 모험담이라면 이정도 스케일은 되어야하구나 란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이 책에서 좋았던 건 호메로스가 노래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역자 김원익 작가의 옮긴이의 말이었다. 영웅과 여성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여신의 몰락을 변하는 사회 상황과 엮어서 들려주었다. 이윤기 선생님이 그리스 로마 신화 각각에 대해 현대적 해석을 이야기 속에 녹여서 들려준 것과는 달랐다. 본인의 글만으로 한 챕터를 채우니 좀 더 정연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책 속 내용에 만족했는데 이번 선택은 실패라고 했다. 그럼 하나뿐이지 않겠는가. 그렇다. 책을 더 샀다. 이 책은 소장해야겠다 마음 먹은 것은 물론이고 이 작가의 일리아스와 사랑의 기술을 더 샀다. (사랑의 기술이라니!!! 읽지 못한 또 다른 사랑의 기술이 이미 있는데!!!) 북유럽 신화도 재미있을 것같고 신화이야기가 시리즈로 나와있다!! (책은 이렇게 무한 증식한다.)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는 벌써 삼백만원치에 가까운 책들이 담겨있지만 거기에 또 이 책들을 더했다. 


중고로 오만원치 팔아야 오만원치 더 사겠다는 다부졌던 나의 각오는 이미 희미해진지 오래다. 이러면 책이 좀 줄어 들겠지 했지, 중고로 팔고 중고로 살 것은 계산에 넣지 못했다. 가로로 쌓는게 압박감을 느끼니, 두줄로 꽂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은 책의 물성을 포기할 수 없기에 또 장바구니에 담는다. 오늘은 성공할 수 있는 책을 골라야지. 올해 안에 꼭 책꽂이 한 칸을 읽고, 비워야지. 다부지게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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