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시카가 건넨 용기

by 스텔라

여전히 내게 닿지 않은 오래된 작품들이 많다. 이름을 알면서도 미뤄두거나 아직 이름도 모를 아름답고 반짝이는 창조물도.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는 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워진다.


얼마 전 처음 본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가 그러하듯이. 비장하고 엄숙한 세계관 속 온통 두려움에 휩싸여 전쟁을 벌이는 대다수의 인류와 달리 나우시카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방어막이나 주춤대는 망설임 없이 맑고 곧은 눈으로 나우시카는 두려운 사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신을 모두 내맡긴다.

사람들은 세계를 어쩔 수 없이 파괴하고 짓밟고 쟁취하고 통제하고 침략만이 남은 비극적인 디스토피아의 시선으로 보지만, 나우시카에게 세계는 기쁨과 평온, 치유와 사랑이 가득하다. 나우시카는 세계를 알고 싶어 하고,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인내하며 관찰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나우시카에게 슬픔이나 고통이 없기 때문에 맑고 순진하게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영문 모를 순간, 사랑하는 아버지가 다른 나라 군인들에게 순식간에 죽임을 당한 순간 나우시카마저 분노에 휩싸여 그들에게 반격한다. 그러나 나우시카가 원하는 건 패닉에 가까운 공포도 피의 복수도 아니다. 나우시카는 아무리 자신이 상처 입어도 아무리 상대방이 공포와 미움으로 나우시카를 공격해도 생명이 계속되고 그들이 안전하길 바란다. 자연도 동물도 사람도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가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기만을 원한다.


나우시카의 빛나고 굳건한 표정은 나를 눈물짓게 했다. 나우시카의 사랑이 아름답고 거대해서 그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사랑스럽고 한없이 밝은 빛처럼 느껴져서 아무도 미워하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나우시카의 용기와 사랑을 꼭 빼닮고 싶어서 시간을 멈추고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의 주제곡을 오래오래 들었다.



어제는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졌다. ‘오쇼’의 책을 읽다가 오쇼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넷플릭스 다큐 ‘오쇼의 문제적 유토피아’를 보았다. 흥미롭긴 했지만, 거기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미지의 존재, 이방인을 두려워한다. 나와 다르고 겪어본 적 없는 생소함에는 증오를 품고 매도하기 쉽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두려움을 강화한다. 거기에 완력과 폭력이 충동적으로나마 스파크가 튀면 걷잡을 수 없이 화염으로 뒤덮여 많은 이가 고통받고 너무 많은 일이 꼬여버린다. 누군가의 두려움은 상처를 내고, 상처받은 누군가는 복수와 앙갚음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려 한다. 그렇다면 굳이 흘릴 필요 없는 피를 너무 많은 사람이 흘리게 된다.


나는 두려움에 휩싸여 나를 공격하는 분노로 눈을 감은 상황에서 나우시카처럼 두려움이나 공포를 상대방에게 되갚으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인간에게는 생존본능이 있고, 두려움 속에서는 자기합리화가 어느 때보다 쉬워진다.



어제 꿈에서는 집이 엉망진창인데 갑자기 손님 무리가 들이닥쳤다. 식탁에는 더러운 그릇과 접시가 가득 있고, 침대도 엉망이고, 거실에는 온갖 잡동사니와 물건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창문으로 집에 무단 침입한 남자, 얼마 후 엄마는 귀한 손님을 난장판에 연락도 없이 데려왔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동물처럼 신음했다. 그건 내가 감당하기 너무 두려운 상황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부엌을 정리하던 통에 견과류 통을 부엌 바닥에 쏟았다. 그것들을 담으려 하는데 외갓집 친척들이 단체로 들어왔다.


나는 여전히 내가 준비되지 않았는데 과도하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마주하면 엄청난 스트레스와 두려움을 느꼈다. 그 꿈에서는 아무도 내게 집 청소를 하지 않았다고 나무라거나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도 없었고, 다들 나를 도와주고 이해해줬는데도 두려움에 가슴이 눌리듯 아팠다.


그 밖에도 여전히 두려운 건 너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단절, 누군가를 상처입히는 것, 나의 이윤을 위해 타인에게 무언가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울까? 잃을 거라고는 착각에 가까운 통제감에서 비롯한 만족감, 약간의 평판, 육체, 작고 귀여운 돈, 나라는 자아 감각 그리고 이번 삶의 기억 정도인데 말이다. 여전히 내게는 ‘자아’라는 개념이 유효하다. 물질적인 손해나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자아’ 관념을 이루고 있는 민감한 사안이 철회되거나 만천하에 드러날 때 나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른다.


두려움의 빗장을 하나하나 풀고 싶다. 나우시카처럼 고요하고 담담하고 흔들림 없이 미지의 존재에게 기꺼이 내 모든 걸 내어주고 그들을 이해하려 다가가고 싶다. 두려운데도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건 싫다. 그건 거짓이니까. 그렇지만 악몽에 기뻐하자. 아직 더 채울 수 있는 사랑이 남아있음에 기뻐하자.


2022년 3월 17일 목요일